혜초 ()

불교
인물
남북국시대, 인도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과 『대승유가만수실리왕경서』를 저술한 신라의 승려.
이칭
이명
혜초(惠超)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700년 경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신라
주요 저서
『왕오천축국전』, 『대승유가만수실리왕경서』
내용 요약

혜초(慧超)는 남북국시대 인도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과 『대승유가만수실리왕경서』를 저술한 신라의 승려이다. 당에 유학하여 장안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당(唐)의 밀교 승려 금강지(金剛智)와 불공(不空)에게 배웠고, 말년에 당나라 오대산에서 활동하였다.

목차
정의
남북국시대, 인도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과 『대승유가만수실리왕경서』를 저술한 신라의 승려.
인적사항

혜초(慧超)는 혜초(慧超) 또는 혜초(惠超)로 표기된다. 당(唐)의 밀교 승려 불공(不空)의 제자는 혜초(慧超)라고 표기하며,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의 저자는 혜초(惠超)라고 표기한다.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가 『왕오천축국전』의 저자 혜초와 불공의 제자인 신라 승려 혜초가 동일 인물이란 의견을 제시하였으며, 현재 이 의견은 통설로 인정되고 있다.

혜초는 신라의 혜초라고 하였기 때문에 중국에서 활약했지만 신라 출신임은 분명하다. 700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측할 뿐 혜초의 생몰년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주요활동

혜초의 행적은 크게 인도 구법행과 중국 귀환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혜초가 인도로 주1 여행을 떠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723년경으로 추정한다. 인도 여행을 해로로 갔는지 육로로 갔는지도 불분명하다. 그는 만 4년 동안 인도를 여행하였고, 카슈미르(Kashmir) · 아프가니스탄 · 중앙아시아 일대까지 답사하였다. 인도 구법 여행을 하게 된 동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8대 탑으로 상징되는 인도의 불적지를 순례하는 것이 혜초의 목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밀교의 승려 금강지(金剛智)가 당시 장안(長安) · 낙양(洛陽) 등지에서 밀교를 가르쳤는데, 이때 혜초가 그의 문하에 들어갔기 때문에 혜초가 스승의 권유로 인도 구법을 결심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혜초가 다시 장안으로 돌아온 때는 727년(개원 15)경으로, 『왕오천축국전』에 따르면 혜초가 그해 11월에는 당시 안서도호부 소재지인 쿠차[龜茲]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중국으로 귀환한 이후 혜초는 금강지와 불공(不空)에게 밀교를 전수받았다. 혜초는 장안과 중국 오대산(五臺山)을 중심으로 밀교를 연구하였고, 경전을 주3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혜초는 이후 일본 주2의 계보에도 수록되었다.

혜초는 733년(개원 21)에 장안 천복사(薦福寺)에서 금강지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현종(玄宗)의 칙명으로 740년에 금강지가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大乘瑜伽金剛性海曼殊室利千臂千鉢大敎王經)』을 번역할 때 혜초는 주4의 임무를 담당했다. 혜초는 금강지가 입적한 후에는 불공의 문하에 있으면서 774년(대력 9)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유가심지비밀법문(瑜伽心地秘密法門)을 배웠다.

이러한 내용은 혜초가 작성한 「서문」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741년에 금강지가 입적했는데 혜초의「서문」에는 742년에도 금강지가 생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774년 6월에 불공이 입적했는데 그해 10월에 혜초가 불공으로부터 법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혜초가 작성한 연대에는 다소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불공은 입적하면서 밀교를 널리 펼칠 6명의 제자를 꼽았는데, 여기에 혜초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불공은 21인의 밀교 고승들에게 흥선사(興善寺) 관정도량(灌頂道場)과 대성문수각(大聖文殊閣)에서 나라를 위한 주6독경을 요청하였는데, 이 21인에도 혜초가 포함되었다. 혜초에 관해서는 ‘신라인’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따라서 중국 밀교의 법맥이 금강지-불공-혜초로 이어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774년 2월 혜초는 내도량(內道場)의 사문으로 활동하면서 성지인 옥녀담(玉女潭)에서 기우제를 주관하고 「하옥녀담기우표(賀玉女潭祇雨表)」를 지었다. 그 뒤 혜초는 수년 동안 장안에 머물다가 780년(건중 1) 오대산으로 옮겨갔다. 오대산은 불공이 오래 머무르던 곳이며 불공의 제자인 함광(含光)도 여기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오대산의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서 지내면서 이전에 필수를 맡았던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을 필사하고 이 경을 번역한 유래와 비밀스러운 뜻[秘義]를 간략히 서술한 「서문」을 지었다.

혜초는 살아 있는 동안 신라로 귀국한 흔적이 없다. 다만 그에 관한 기록이나 저술에서 ‘신라인’임이 강조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어떠한 형태로든지 신라와 관련을 맺었으리라 추론해 볼 수 있다.

주석
주1

부처의 진리를 구함. 우리말샘

주2

대일삼부경 따위에 의거하여 양계를 세워, 다라니의 가지(加持)의 힘으로 자기 몸이 곧 부처가 됨을 종지(宗旨)로 하는 종파. 인도에서 일어나 중국 당나라에 전해져, 금강지의 제자 불공(不空)에 이르러 대성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신라 문무왕 4년(664)에, 혜통(惠通)이 당나라 선무외 삼장(三藏)으로부터 인결(印訣)을 받아 와 연 것으로 전한다. 우리말샘

주3

한문으로 번역함. 또는 그런 글이나 책. 우리말샘

주4

번역한 말을 받아 적음. 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 우리말샘

주6

‘염불 송경’을 줄여 이르는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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