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후기에 임춘(林椿)이 지은 가전작품. 술을 의인화하여 지은 작품이다. 작자의 유고집인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 권5과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
주인공 국순의 조상은 농서(隴西 : 중국 甘肅省에 있는 고을의 이름) 사람으로 90대 조상인 모(牟: 보리)가 후직(后稷: 옛적에 농사를 맡은 벼슬)을 도와 백성들을 먹여 살린 공이 있었다. 모는 처음에 벼슬하지 않고 숨어살며 이르기를 “나는 반드시 밭을 갈아야만 먹으리라.”고 하며 밭에서 살았다. 임금을 좇아 원구(圜丘: 하늘에 제사지내는 壇)에 종사한 공으로 중산후(中山侯)로 봉하여졌고, 국씨(麴氏)라는 성을 받았다.
위(魏)나라 초기에 이르러 국순의 아버지 주(酎: 소주 · 전국술 · 醇酒)가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주는 상서랑(尙書郎) 서막(徐邈)과 더불어 서로 친해져서 입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국순의 기국과 도량은 크고 깊어 출렁거리고 넘실거림이 마치 만경창파의 물과 같았다. 그래서 맑게 해도 더 맑지 않고, 흔들어도 흐려지지 않았으며, 그 맛이 한때에 드날리고 자못 사람에게 기운을 더해주었다.
국순은 군신의 회의에는 반드시 나아갔고, 그 진퇴와 수작이 임금의 뜻에 맞아서 마침내 권세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순은 손님접대 · 노인봉양 · 고사(告祀) 및 종묘제사를 모두 주재했다.
그러나 국순은 전벽(錢癖: 돈을 밝히는 병통)이 있어서 당시의 의론이 그를 더럽게 여겼다. 국순이 늙어 관을 벗고 물러날 때에 임금에게 아뢰기를, “신이 작(爵)을 받고 사양하지 않으면 마침내 망신할 염려가 있사오니, 신을 집에 돌아가게 해 주시면 족히 그 분수를 알겠나이다”라 하였다. 국순은 집에 돌아온 뒤에 갑자기 병이 들어 하루저녁에 죽었다.
사신(史臣)이 이르기를 “국씨의 조상이 백성에게 공이 있어 국순이 벼슬에 발탁되었으나, 왕실이 어지러워 엎어져도 붙들지 못하더니, 마침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이는 거원(巨源: 중국 晉나라의 문인인 山濤를 이름.)의 말이 족히 믿을 만하다”고 하였다.
임춘은 이 작품을 통해서 인생과 술의 관계를 문제삼고 있다. 즉, 인간이 술을 좋아하게 된 것과 때로는 술 때문에 타락하고 망신하는 형편을 풍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인간과 술의 관계를 통해서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조명해본 것이다. 당시의 여러가지 국정의 문란과 병폐, 특히 벼슬아치들의 발호와 타락상을 증언하고 고발하려는 의도의 산물이다.
≪국순전≫은 소아배들의 득세와 뛰어난 인물들이 오히려 소외되는 현실을 풍자,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