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시화』는 조선 시대 허균이 우리나라 역대의 시를 시사적(詩史的)인 관점에서 평가한 평론집이자 시평집이다. 최치원(崔致遠)에서부터 저자 당대의 인물은 물론 승려·여성들의 시까지 포괄하여 수록하였다. 허균은 96칙(則)에 걸쳐 간정(簡精)하게 평설(評說)하였는데 당시(唐詩)에 기준을 두고 비평하였다. 당시(唐詩)를 부흥시키는 주역으로 지칭되던 이달, 최경창, 백광훈 등 3인을 가리켜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삼당시인의 영향과 송시에서 당시로 전환해 가는 시점의 비평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작자가 43세 되던 해인 1611년(광해군 3)에 함산(咸山)에서 귀양살이할 때 지었다. 최치원(崔致遠)에서부터 저자 당대의 인물은 물론 승려 · 여성들의 시까지 포괄하고 있으며, 96칙(則)에 걸쳐 간정(簡精)하게 평설(評說)하였는데 당시(唐詩)에 기준을 두고 비평하였다. 저자의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25 설부(說部) 4에 수록되었으며, 『시화총림(詩話叢林)』 권3에도 전문이 실려 있다.
저작동기 및 작성연월을 밝힌 인(引)이 권두에 붙어 있다. 허균의 다른 시화집인 『학산초담(鶴山樵談)』은 저자 당대의 시를 주로 하여 공시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반면에 『성수시화』는 고대 이래의 역대적인 기술로서 시사적(詩史的)인 면이 있다. 그러므로 ‘인’에서도 “위아래 800년 간의 것을 수집하고 선출하였다.”라고 하여 시사적 편찬임을 밝혔다.
1973년 아세아문화사에서 영인한 『시화총림』 권3에 수록된 것을 비롯하여, 1980년 아세아문화사에서 영인한 『허균전서』 권25에 수록되어있다. 1981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영인한 『허균전집』 권25에도 수록되어 있다.
구성 내용은 본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략 86항으로 나누어져 있다. 수록 인물은 최치원(崔致遠)에서 저자 당대의 인물은 물론, 승려 · 여성을 비롯하여 자신의 형제들 시까지 포괄하고 있다.
시평의 성격은 우선 시사적인 면으로서 “국초의 시는 … 당나라 사람에 손색이 없다.”, “우리나라의 시는 중종조에 이르러 대성하였다.”, “우리나라 시는 선조조에 이르러 대비하였다.”와 같이 시대별로 특색을 들거나 혹은 그 시대의 성대함을 말하였다.
그리고 역대 시인들을 논평하면서 이달(李達)보다 나은 사람은 없다고 하여 높이 평가하였다. 당시(唐詩)를 부흥시키는 주역으로 지칭되던 이달 · 최경창(崔慶昌) · 백광훈(白光勳) 등 3인을 가리켜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하였다.
허균은 이들 중에서도 특히 이달을 대가라고 추존하였다. 그는 “3인 모두가 당시의 궤도를 잃지 아니하니 진실로 천년간의 드문 시이다. 이달은 시재가 가장 뛰어났다. 따라서 최경창과 백광훈을 포괄해서 스스로 대가를 이루었다.”라고 하였다.
이들 내용 증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당나라 시를 존숭하고 송나라 시는 축출하자고 주장하는 ‘존당출송론(尊唐黜宋論)’이다. 이러한 견해는 삼당시인의 영향과 송시에서 당시로 전환해 가는 시점의 비평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허균은 당시에 기준을 두고 시를 비평하였다. 그는 시평에서 “성당시(盛唐詩)와 같다.”, “성당의 풍격이 있다.”, “성당시와 견줄 수 있다.”, “당인의 감정에 손색이 없다.”, “당인과 매우 비슷하다.”, “당인과의 거리가 멀지 않다.”, “당시를 배웠다.”라고 하거나 당나라의 대가들을 예로 들면서 “두보의 시에 들어가고 진사도(陳師道)를 내쫓는다[入杜出陳].”, “두보와 매우 비슷하다.”라고 하였다.
허균은 송시를 지양하고 당시를 추존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그의 시관을 잘 나타내고 있다. " 최립(崔岦)이 치지도외하여 김종직(金宗直)의 문장을 가장 업신여겼다."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김종직의 시가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을 배웠기 때문이며, 중국의 오명제(吳明齊)는 정사룡(鄭士龍)의 시를 보고서 “당신의 재주는 용을 잡을 재주인데, 겨우 개를 잡으니 아깝다.”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가 당시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성수시화』는 비평적 안목이 뛰어나다고 한 저자의 역량을 보여주는 본격적 시비평집이다. 그 뒤에 시평가의 주목을 받아 시를 평하는 사람마다 인용하거나 거론하여, 시평의 귀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