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부부고 ()

한문학
문헌
조선 중기, 문신 허균(許筠)의 시문집.
문헌/고서
편찬 시기
1612~1613년
저자
허균(許筠)
권책수
8권 1책
판본
필사본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내용 요약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는 조선 중기 문신 허균(許筠)의 시문집이다. 허균은 자신의 시문을 시부(詩部)·부부(賦部)·문부(文部)·설부(說部) 등 4부로 분류하여 정리하였다. 허균이 스스로 편집하였고, 구성의 참신성으로 후대 문집에 좋은 모범이 되었다.

정의
조선 중기, 문신 허균(許筠)의 시문집.
편찬 및 간행 경위

편찬된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만력(萬曆) 계축에 쓴 이정기(李廷機)의 서문으로 미루어 보면 1613년(광해군 5) 봄이나 그 전해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때는 허균(許筠)의 일생 중에서 가장 불우했던 시기이다. 그가 칩거하면서 그동안 저술한 시와 산문들을 모아 시부(詩部) · 부부(賦部) · 문부(文部) · 설부(說部) 등 4부로 나누어 정리한 초고이다.

외손인 이필진(李必進)의 발문에 “부부고(覆瓿藁)라는 것은 외할아버지 교산(蛟山)의 유고이다. 부부 · 문부의 6권 외에 또 시부가 있어 모두 8권인데 전질을 손수 썼다. 「갑진명주고(甲辰溟州藁)」, 「서관행록(西關行錄)」, 「계축남유초(癸丑南遊草)」, 「을병조천록(乙丙朝天錄)」 제2권은 옥사가 일어나자 마침내 모면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이것을 정리하여 우리 집에 보내게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발문에 적힌 「갑진명주고」와 「을병조천록」 이하 몇 권의 저술들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말년의 저술들이 이 책에 수록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허균은 역적의 괴수로 극형을 받고 죽었기 때문에 그의 문집은 공개적으로 발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몰래 필사하여 전해졌으므로 오자와 낙서가 적지 않다. 저본은 1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사본이다. 책마다 첫 장에 정조 대왕이 세손 때에 사용한 장서인인 ‘관물헌(觀物軒)’과 ‘이극지장(貳極之章)’이라는 어인이 찍힌 귀중본이다.

명나라 주지번(朱之蕃)이 허균의 시문(詩文)을 읽어 보고 감탄하여 전집(全集)을 보여 달라고 청한 바 있었다. 이에 전집을 직접 정리한 것으로, 허균이 자신의 화난을 짐작하고 정서로 필사해 편차(編次)해 두었던 것을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의 손자인 사위 이사성(李士星)의 집으로 미리 보내 간직하게 하였다.

구성과 내용

이정기(李廷機)의 서문에서는 이 책을 『부부고사부(覆瓿藁四部)』라 칭하고 있다. 원래 서명이 이러했다고 생각된다. 사부(四部)란 본문이 시부(詩部) · 부부(賦部) · 문부(文部) · 설부(說部)로 나뉘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 사부고(四部藁)는 모두 26권으로 편차되어 있으며, 『 한정록(閒情錄)』은 부록으로 붙어 있다.

이러한 구성 방식은 일반 문집의 편찬 체재와 다르나 각 부의 배열을 보면 부부와 문부의 내용은 일반 문집의 체재와 거의 비슷하다.

먼저 시부는 권 1, 2이다. 시고는 시가 지어진 경로에 따라 편목(篇目)을 묶어 그것을 연대순으로 배열했다. 「정유조천록(丁酉朝天錄)」, 「남궁고(南宮藁)」, 「궁사(宮詞)」 등과 같이 시기나 주제별로 묶어서 수록하고 있어 이색적이다. 이러한 체재는 이후에 많은 문집에서 채택되었다.

부부(賦部)는 권 3으로, 「동정부(東征賦)」 등 부 9편과 「훼벽사(毁璧辭)」 등 2편의 사부(辭賦)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문부(文部)는 권 4에서 권21까지이다. 서(序) · 기(記) · 전(傳) · 논(論)으로부터 척독(尺牘)에 이르기까지 각체의 문장을 문체(文體)별로 구분해서 수록하고 있다.

설부(說部)는 권22에서 권26까지이다. 잡록(雜錄) · 필기(筆記)에 해당하는 「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 · 「 성수시화(惺叟詩話)」 · 「 도문대작(屠門大嚼)」이 수록되어 있다.

부록(附錄)으로 권1~17까지 『한정록』이 수록되어 있다.

시부에는 곳곳에 이달(李達)권필(權韠)과 같은 대시인의 평어를 주석으로 자세히 실었다. 이 점은 허균의 시에 대한 그 시대의 높은 평가를 확인시켜 준다. 작품 가운데 「풍악기행(楓嶽紀行)」 47편, 「궁사」 100편, 「열악(閱樂)」 8편 등은 절창으로 그 시대에 널리 회자되었다.

또한 설부에 실려 있는 「성수시화」는 별도로 전하는 『 학산초담(鶴山樵談)』과 함께 우리나라의 역대 시화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이다. 모두 85수의 시화를 수록하였다. 보통의 경우 설부의 내용은 잡저라 하여 문부의 일부에 편입시키거나, 혹은 패설류를 혼합하여 분별없이 수록하는 것이 상례이다.

의의와 평가

『성소부부고』는 허균이 스스로 편집하였고, 구성의 참신성으로 후대 문집에 좋은 모범이 되었다.

권필은 허균의 「궁사」를 높이 평가하여, “궁중의 사실을 눈으로 보듯이 모두 열거하였으니, 족히 일대의 시사(詩史)가 될 만하다. 송 · 원의 사람이라도 감히 따를 수 없으니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라고 하였고, 「열악」은 “여러 시들이 모두 밝고 높고 화려해서 다른 작품과 같지 않으니 이것이 절창이 된다.”라고 칭찬해 마지아니하였다.

또한 허균의 선시안(選詩眼)과 비평은 그 시대나 후대에도 익히 인정되었다. 그의 시대에는 복고의 풍조가 성행하여 송시에서 당시(唐詩)의 경향으로 옮아가던 시기였다. 그의 시에도 이러한 당시풍은 그대로 반영되었고, 비평의 기준 또한 성당(盛唐)을 표준으로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우리나라의 시풍을 당시풍으로 옮겨 놓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허균,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단행본

신호열,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해제」(민족문화추진회, 1982)
신용남, 『국역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해제』,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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