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경

  • 역사
  • 인물
  • 조선 전기
조선 전기에, 대사헌,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 이칭남당(南堂), 홍련거사(紅蓮居士)
  • 동고(東皐), 연방노인(蓮坊老人)
  • 원길(原吉)
  • 시호충정(忠正)
인물/전통 인물
  • 관련 사건갑자사화|중종반정
  • 본관광주(廣州)
  • 사망 연도1572년(선조 5)
  • 성별남성
  • 주요 관직홍문관부수찬|사헌부장령|대사헌|우의정|영의정
  • 출생 연도1499년(연산군 5)
  • 출생지서울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신해순 (성균관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7월 13일
동고유고 미디어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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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이준경은 조선전기 대사헌,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499년(연산군 5)에 태어나 1572년(선조 5)에 사망했다. 갑자사화에 연좌되어 6세에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해배되었다. 1522년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문과에 급제하였다. 1565년 영의정에 임명되었는데 하성군 이균을 왕으로 세우고 원상으로서 국정을 보좌하였다. 기묘사화와 을사사화 때에 화를 입은 사류들의 신원을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수십 년간 유배 생활을 한 노수신·유희춘 등을 석방해 등용하였다. 붕당을 예견하였다가 이이·유성룡 등 신진 사류들의 규탄을 받았다.

정의

조선 전기에, 대사헌,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 · 남당(南堂) · 홍련거사(紅蓮居士) · 연방노인(蓮坊老人). 서울 출신. 이극감(李克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이세좌(李世佐)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수찬 이수정(李守貞)이며, 어머니는 상서원판관 신승연(申承演)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화를 입어 사사된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연좌되어 6세의 어린 나이로 형 이윤경(李潤慶)과 함께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외할아버지 신승연(申承演)과 황효헌(黃孝獻)에게서 수학하고 이연경(李延慶)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웠다.

1522년(중종 17)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1531년(중종 26) 식년 문과에 급제해 한림을 거쳐 1533년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그해 말 구수담(具壽聃)과 함께 경연에 나가 중종에게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사류들의 무죄를 역설하다가 오히려 권신 김안로(金安老) 일파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제거된 뒤 다시 등용되어 세자시강원필선 · 사헌부장령 · 홍문관교리 등을 거쳐 1541년 홍문관직제학 · 부제학으로 승진되고 승정원승지를 지냈다. 그 뒤 한성부우윤 · 성균관대사성을 지냈고, 중종이 죽자 고부부사(告訃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1545년(인종 1) 을사사화 당시 평안도관찰사로 지방에 나가 있어 화를 면하였다.

1548년(명종 3) 다시 중앙으로 올라와 병조판서 · 한성부판윤 · 대사헌을 역임했으나 1550년 정적이던 영의정 이기(李芑)의 모함으로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53년 함경도지방에 야인들이 침입하자 함경도순변사가 되어 그들을 초유(招諭)하고 성보(城堡)를 순찰하였다.

이어 대사헌과 병조판서를 다시 지내고 형조판서로 있다가 1555년 을묘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도순찰사로 출정해 이를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우찬성에 오르고 병조판서를 겸임했으며, 1558년 우의정, 1560년 좌의정, 1565년 영의정에 올랐다. 1567년 하성군(河城君) 이균(李鈞)을 왕으로 세우고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보좌하였다.

이 때 기묘사화로 죄를 받은 조광조(趙光祖)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을사사화로 죄를 받은 사람들을 신원하는 동시에 억울하게 수십 년간 유배 생활을 한 노수신(盧守愼) · 유희춘(柳希春) 등을 석방해 등용하였다. 그러나, 기대승(奇大升) · 이이(李珥) 등 신진 사류들과 뜻이 맞지 않아 이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1571년(선조 4)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임종 때 붕당이 있을 것이니 이를 타파해야 한다는 유차(遺箚)를 올려 이이 · 유성룡(柳成龍) 등 신진 사류들의 규탄을 받았다. 저서로는 『동고유고』 · 『조선풍속(朝鮮風俗)』 등이 있다. 선조 묘정에 배향되고, 충청도 청안(淸安)구계서원(龜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참고문헌

  • - 『중종실록(中宗實錄)』

  • - 『인종실록(仁宗實錄)』

  • - 『명종실록(明宗實錄)』

  • - 『선조실록(宣祖實錄)』

  • - 『국조방목(國朝榜目)』

  • - 『동고유고(東皐遺稿)』

  • - 『소재집(蘇齋集)』

  • - 『남명집(南冥集)』

  •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 『해동잡록(海東雜錄)』

  •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 - 『당의통략(黨議通略)』

  • - 『조선명인전』(신석호 외, 조광사, 1939)

주석

  • 주1

    : 생원과 진사를 뽑던 과거. 초시와 복시가 있었다. 우리말샘

  • 주2

    : 1368년에 주원장이 강남(江南)에서 일어나 원(元)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세운 중국의 통일 왕조. 영락제 때 난징(南京)에서 베이징으로 도읍을 옮기고 몽고와 남해에 원정하여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뒤에 북로남왜에 시달리고 환관의 전횡과 당쟁, 농민의 반란이 끊이지 않아 1644년에 이자성(李自成)에게 망하였다. 우리말샘

  • 주3

    : 중국 명나라 때에, 남만주의 건주 지역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 영락제 때에 설치한 건주위의 지배를 받고 살다가, 1616년에 누르하치가 나타나 세력을 통합하여 후금을 세웠다. 우리말샘

  • 주4

    : 불러서 타이름

  • 주5

    : 적을 막으려고 성 밖에 임시로 만든 소규모의 요새(要塞). 우리말샘

  • 주6

    : 조선 명종 10년(1555)에 전라남도 해남군에 있는 달량포(達粱浦)에 왜선(倭船) 60여 척이 쳐들어온 사건. 이 사건을 계기로 비변사가 상설 기구가 되었다. 우리말샘

  • 주7

    : 유훈으로 남기는 차자

  • 주8

    : 학문을 연구하고 덕을 닦는 선비의 무리. 우리말샘

  • 주9

    : 공신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일. 우리말샘

  • 주10

    : 제왕이나 재상, 유현(儒賢) 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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