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이로(以老), 호는 성재(性齋). 포천 출생. 허병(許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허윤(許玧)이고, 아버지는 허형(許珩)이며, 어머니는 이중필(李重泌)의 딸이다.
1835년(헌종 1) 39세의 나이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40년 기린도찰방(麒麟道察訪), 1844년 전적(典籍)·지평(持平)을 거쳐 1847년 함평현감이 되었다. 1850년(철종 1) 교리·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춘추관기사관 등을 역임하면서 경연에 참가해 국왕에게 유교경전을 해설하였다.
1855년 당상관에 오르면서 벼슬이 우부승지와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1862년 진주 민란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들끓자, 그 해소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1864년(고종 1) 김해부사로 부임해 향음주례를 행하고 향약을 강론하는 한편, 선비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쳤다.
그 뒤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거쳐, 1876년 정헌대부(正憲大夫), 1886년 숭록대부(崇祿大夫)가 되었다. 이익(李瀷)·안정복(安鼎福)·황덕길을 이은 기호(畿湖)의 남인학자로서 당대 유림의 종장(宗匠)이 되어, 영남 퇴계학파를 계승한 유치명(柳致明)과 쌍벽을 이루었다.
그는 경의(經義)와 관련해 항상 실심(實心)·실정(實政)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현실에 바탕한 구체적인 개혁안도 제시하였다. 저서로는 『성재집』·『종요록(宗堯錄)』·『철명편(哲命編)』을 비롯해, 선비의 생활의식을 집대성한 『사의(士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