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

청백록
청백록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선정을 위해 청렴결백한 관리를 양성하고 장려할 목적으로 실시한 관리 표창제도, 또는 염근리(廉謹吏: 청렴하고 근면한 관리)와 청백리에 선정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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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청백리는 조선시대 선정을 위해 청렴결백한 관리를 양성하고 장려할 목적으로 실시한 관리 표창제도이다. 조선 건국 이후에 나라를 유지하고 사습(士習)을 일신하고 민풍(民風)을 교화하기 위하여 사대부가 지켜야 할 규범으로 염치(廉恥)를 권장하면서 실시되었다. 의정부 또는 비변사와 이조에서 각각 왕명에 따라 경외 2품 이상 관인 가운데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는 2인씩을 추천하게 하였다. 추천자를 육조판서가 심사한 뒤 국왕의 재가를 얻어 확정하였다. 『전고대방』과 『청선고』 등에 수록된 명단을 근거로 200여명 내외 선발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의
조선시대 선정을 위해 청렴결백한 관리를 양성하고 장려할 목적으로 실시한 관리 표창제도, 또는 염근리(廉謹吏: 청렴하고 근면한 관리)와 청백리에 선정된 사람.
연 원

청백리제가 제도화 된 것은 조선시대였다. 그러나 전한(前漢) 이래 역대 중국신라 이래 우리 나라에서도 염리(廉吏)를 선발해 재물을 주거나 관직에 제수하였다. 후손에게 청백(淸白)의 관리가 될 것을 권장한다던가 세인들이 청백한 관리를 칭송하였던 사실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의 경우 서기전 168년(한문제 12)에 “염리는 백성의 표상(表象)이다.”라고 하면서 200섬의 녹을 받는 염리에게 비단 3필을, 200섬 이상의 녹을 받는 염리에게는 100섬당 비단 3필을 각각 수여하였다. 서기전 134년(한무제 1)에는 관리를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군국(郡國)으로 하여금 염명(廉名)이 있는 자 1인씩을 천거하게 하여 관직을 제수하였다고 한다. 이후 청렴결백한 관리에 대한 우용(優用) · 표창제가 계속 이어지면서 청렴결백한 관리의 출현은 사회 기풍의 진작에 크게 기여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후한대의 양진(楊震), 양대(梁代)의 서면(徐勉), 수대(隋代)의 방언겸(房彦謙), 송대의 두건(杜愆) 등을 들 수 있다. 그 가운데 양진의 후손에서 대대로 청백리가 배출됨으로써 대표적인 청백리가문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삼국 · 통일신라 · 발해 · 태봉 · 후백제는 명확하지 않다. 고려시대의 경우에도 청백리를 우용, 표창하는 청백리제도가 언제 실시되었는가는 분명하지 않다.

1136년(인종 14)에 “청백수절자(淸白守節者)를 서용하였다.”고 하였으며, 최석(崔奭)남경유수로 부임하는 유청(惟淸) 등 두 아들에게 “청백(淸白) 외에 다른 재물은 가문의 전하는 바가 아니도다. 경서 만권이 가보로 전하노니, 이를 나누어 부지런히 읽기를 바라노라. 세상에 이름을 빛내고 도를 행하여서 인군(人君)을 높게 하노라(家傳淸白無餘物 只有經書萬卷存 恣汝分將勤讀閱 立身行道使君尊).”라는 시로써 청백리가 될 것을 훈계하였다. 윤해(尹諧) · 최영(崔瑩) 등의 청백함이 칭송되고 있는 사실 등을 미루어 청백리의 기원을 유추할 수 있다.

제도의 정착

청백리제의 제도화가 명확하게 드러난 것은 조선시대였다. 그러나 청백리가 언제 제도화되었는지와 선발 시기 역시 분명하지 않다. 그렇지만 태조안성(安省) 등 5인을 청백리에 녹선한 이래로 이러한 기록들이 후대에도 계속 확인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시기엔가 제도화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1514년(중종 9) ‘청백리에 녹선된 자의 행적을 보면 시종(始終)이 한결같은 자가 드물다.’고 하고, 1552년(명종 7)에는 생존시에 청백리로 선발된 자를 염근리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대에는 청백리의 선발 절차를 구체적으로 규정하였다.

조선왕조는 개국과 함께 나라를 유지하고 사습(士習)을 일신하고 민풍(民風)을 교화하기 위해 『관자(管子)』에 적기된 예(禮) · 의(義) · 염(廉) · 치(恥)의 사유(四維), 특히 염 · 치를 사대부가 지켜야 할 규범으로 권장하였다. 이를 볼 때 청백리제는 조선개국 초기부터 실시되고, 중종대 정비되었으며, 선조대 선발 절차의 규정 등이 보완되면서 정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선발 절차

청백리의 선발 절차는 다음과 같다. 조선 전기에는 의정부 · 이조, 조선 후기에는 비변사 · 이조가 각각 왕명에 따라 경외2품 이상 관인에게 생존하거나 사망한 인물을 대상으로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는 2인씩을 추천하게 하고, 추천자를 육조판서가 심사한 뒤 국왕의 재가를 얻어 확정하였다.

청백리의 피선 자격은 법전에 명문화된 기록이 쉽게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통일된 기준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조선시대 선발된 청백리의 선발 사유를 보면 ‘청백’ · ‘근검’ · ‘경효(敬孝)’ · ‘후덕(厚德)’ · ‘인의(仁義)’ 등의 품행이 제시되어 있다. 대부분이 국록 이외에 공가(公家)나 사가(私家)에 일체 폐를 끼치지 않고 깨끗하고 검소한 것을 생활 철학으로 살아간 인물이었다. 이 점에서 ‘청백탁이(淸白卓異)’가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고 하겠다.

한편 청백리의 선발시 조선 전기에는 비교적 합당한 인물이 선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당파의 입장이 반영되는 등 변질되었다. 선발 인원수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전거에 없지만 ‘많이 선발하면 그 가치가 떨어지고, 적게 선발하면 응당 선발되어야 할 인물이 누락된다.’는 논란이 제기되는 가운데 조선 전기까지는 최소한의 인원만을 선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조선 후기와 말기에 이르러 노론의 일당 독재, 외척의 세도정치 등과 관련된 관리 기강의 문란, 탐관오리의 만연과 함께 청백리가 선발될 수 있는 여건이 미흡했다. 이런 탓으로 이 시기에는 거의 선발되지 못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생존시 염근리에 선발된 인물에게는 본인에게 재물을 내리거나 관계(官階)와 관직을 올려주고, 적장자(嫡長子)나 적손(嫡孫)에게 재물을 주거나 관직에 등용하도록 하였다.

특히 숙종대(1675∼1720)와 1746년(영조 22) 『속대전(續大典)』 편찬까지는 2품관 이상의 천거로 특채하거나 적손 여부에 구애되지 않고 모두 처음으로 주는 관직의 의망(擬望) 대상에 포함시키도록 상전을 확대할 것이 천명되었다. 그러나 실제 대우는 실행 규정이 명문화되지 않고 인사적체가 격심했던 것과 관련되어 문제가 발생하였다.

영조이익(李瀷)『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조정에 매번 그 자손을 등용하라는 명령은 있으나, 오직 뇌물을 쓰며 벼슬을 구하는 자가 간혹 벼슬에 참여하고 나머지는 모두 초야에서 굶주려 죽고 만다.”고 하였듯이 관직의 등용은 물론 경제적인 대우도 제공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선발 인원

조선 전시기를 통해 청백리에 녹선된 수는 명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명단을 기록하고 있는 『전고대방(典故大方)』에는 218명, 경종 · 정조 · 순조대가 제외된 『청선고(淸選考)』에는 186명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200여명 내외 선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고대방(典故大方)』에 실려 있는 왕대별 인원을 보면 태조대 5인을 시작으로 태종(8인) · 세종(15인) · 세조(7인) · 성종(20인) · 중종(35인) · 명종(45인) · 선조(27인) · 인조(13인) · 숙종(22인) · 경종(6인) · 영조(9인) · 정조(2인) · 순조대(4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218인이 녹선되었지만, 이외의 왕대에는 녹선 기록이 없다.

청백리제의 운영에 있어 조선 전기에는 녹선자가 국가로부터 예우를 받지 못하였지만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관리에게 염 · 치를 일깨우고 탐관오리에게는 자극을 주는 정화 기능을 어느 정도 발휘하였다. 한 예로 세종대의 황희(黃喜)맹사성(孟思誠), 성종대의 허종(許琮)은 장기간 의정에 재임하거나, 의정을 역임한 재상이면서도 초라한 집에서 궁핍한 생활로 일생을 보낸 인물로 조선시대 청백리 재상의 표상으로 칭송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부터는 그 선발이 부실하고 상전도 유명무실하여 이익의 지적처럼 후손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등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제도의 변화

결국 청백리제도는 생존한 인물을 염리로 녹선해 우대하거나, 염리로 녹선되었다가 사망한 인물 또는 그 밖에 사망한 인물 중에서 염명이 높았던 인물을 청백리에 녹선하는 것으로 변용되면서 외형적으로나마 본인보다는 후손에게 혜택이 돌아갔다.

조선 중기 사림이 득세하고 사풍이 진작된 성종 · 중종 · 명종 · 선조대에 많은 인원이 녹선되면서 기풍을 떨쳤으나, 인조대 이후에는 인원이 격감되면서 명목만 유지되었다. 비록 청백리에 녹선되지는 않았지만 태조대의 심덕부(沈德符) 등도 청렴결백한 생활을 한 인물로 염명을 떨쳤다.

청백리에 녹선된 자에게는 사후에 가자(加資) · 승직(陞職)이나 증직(贈職) 등의 우대가 주어졌다. 그리고 그 후손은 그 숫자와 청백리장권책과 관련되어 숙종대나 1746년의 『속대전(續大典)』 편찬까지는 2품대신의 천거로 특채 및 적손 여부에 구애되지 않고 모두 처음으로 주어지는 관직의 의망(擬望) 대상이 되었다.

그 이후도 3의정의 천거로 연간 5인 정도가 특서되었다. 비록 처음으로 주어지는 관직의 의망 범위가 적장후손으로 축소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출사의 혜택을 받았다. 오늘날에도 공무원으로 하여금 청렴과 투철한 봉사정신으로 직무에 정려(精勵)하게 함으로써 선정과 혜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청렴결백한 관리를 장려, 표창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1981년 4월 20일 「국가공무원법」청백리상을 규정하여 같은 해 5월부터 수상을 행하고 있으며, 수상한 자에게는 승진 등의 특전을 주고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목은집(牧隱集)』
『문헌통고(文獻通考)』
『보한집(補閑集)』
『전고대방(典故大方)』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청선고(淸選考)』
『해동명신전(海東名臣傳)』
『청백리정신과 공직윤리』(이서행, 인간사랑, 1991)
『청백리열전』(윤종호, 동숭동, 1993)
「조선조 청백리 공직윤리에 관한 연구」(이서행, 『정신문화연구』 37, 1989)
「청백리제도의 사적고찰」(이장희, 『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한국사학논총』 상, 1992)
관련 미디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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