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廣州). 초명은 소목(少目). 자는 일삼(日三), 호는 설천(雪泉)·천곡(泉谷). 아버지는 안기(安器)이다.
고려 우왕 초 생원에 합격하고, 1380년 (우왕 6)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事)로 급제하여 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를 거쳐 상주판관이 되어 청렴한 이름을 떨쳤다.
조선 개국 후, 1393년(태조 2) 청백리에 뽑혀 송경유후(松京留後)에 임명되었을 때, 자신이 대대로 고려에 벼슬한 가문으로서 어찌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어 송경에 가서 조상의 영혼을 대하랴 하고 궁전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며 통곡하였다. 태조가 이 사람을 죽이면 후세에 충성하는 선비가 없어진다 하고, 죽이려는 좌우를 제지하고 안성을 급히 붙들어 내보냈다 한다.
1396년 봉상시소경(奉常寺少卿)으로서 정희계(鄭熙啓)의 시호를 잘못 지어 축산(丑山)에 유배되고, 1400년(정종 2) 중승(中丞)을 거쳐 지보주사(知甫州事)가 되었다. 1411년(태종 11)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강원도도관찰사가 되었으며, 벼슬이 참찬에 이르고 평양백(平壤伯)에 봉해졌다. 뒤에 장수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사간(思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