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권 11책. 목판본.
1606년(선조 39년)에 작자가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있을 때에 엮은 것이다. 황해도(黃海道)해주(海州) 목사 윤휘(尹暉)의 후원으로 간행되었다.
『대가문회』는 『좌전(左傳)』(4권) · 『국어(國語)』(2권) · 『전국책(戰國策)』(2권) · 『사기(史記)』(3권) · 『한서(漢書)』(3권) · 『한문(韓文)』(4권) · 『유문(柳文)』(3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송팔가문 가운데에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만을 취하였다.
선진양한(先秦兩漢)의 글을 위주로 하였다. 각 권은 고문가의 전집 형태를 취하였다. 유몽인은 고문 가운데서 당송고문을 비판하고 선진양한 산문을 전범으로 삼아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명대 의고파(擬古派) 문인인 왕세정(王世貞)에게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왕도곤(王道昆)의 『부묵(副墨)』을 읽었다.
“왕세정과 이반룡(李攀龍)을 모방하였다. 그러나 웅호(雄豪) 주건(遒健)한 기운에다 고고(高古)한 것을 채웠다. 앞 뒤 백여 편이 한마디도 당송(唐宋)에 구애된 것이 없다. 명유(明儒)의 뜻세움이 고상(高尙)한 것은 실로 본받을 만하다.”고 격찬하였다.
유몽인은 『대가문회』의 문장들을 자신의 뜻대로 모았다. 그리고 『문선(文選)』 · 『숭고문(崇古文)』 · 『고문진보(古文眞寶)』 등의 옛 책처럼 제목에 따라 자집(子集)에서 취하지를 않고서 일가(一家)마다 권을 전적으로 배정하여 초록해서 주1에 편리하게 하였다고 서문에 적었다.
유몽인은 전(箋)을 세 번 베꼈다. 중국의 병부상서 석성(石星) 등이 산절한 것을 토대로 산절하였다고 하였다. 『전국책』을 선한(뽑은) 것은 억양(抑揚) · 합패(闔椑) · 굴기(崛奇)하여 문기(文氣)에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
유종원의 글을 뽑은 것은 정경(精勁)하고도 옛스럽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구양수(歐陽脩)와 소식(蘇軾)의 글은 세상에 많지만 자신은 한번도 그 문호를 엿보지 않았다고도 하였다.
유몽인이 인조반정 때에 주2된 뒤에도 이 책은 널리 읽혔다. 주3에서 주4을 하던 주부(主簿) 이진(李進)이 구양수(歐陽脩) · 소식(蘇軾)의 글과 유종원 글 가운데에 유몽인이 취하지 않았던 것을 더 보충하고 산절한 『산보대가문회(刪補大家文會)』가 평양에서 간행되었다.
신혼(申混)이 쓴 「서산보대가문회후(書刪補大家文會後)」라는 제발(題跋)이 전한다. 『대가문회』는 일본 동양문고(東洋文庫)와 강세황(姜世晃) 후손가에 현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