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학파주1는 왕수인(王守仁)의 양명학 핵심 명제인 ‘심즉리(心卽理)’를 받아들여 참된 자아를 확립하려는 정신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이 학파는 국학(國學)의 여러 분야 연구를 심화시키고, 높은 수준에서 경전을 재해석하였다. 특히 내면의 참된 자아에 대한 성찰과 일상의 실천을 중시하며, 순수한 동기주의를 추구하였다. 정제두 이래로 양명학을 기본으로 삼되 도교와 불교까지 아울러 섭렵하려 하였으며, 송대 성리학(性理學)보다는 한학(漢學) 연구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국학을 일으켰다. 양명학파는 소론이라는 당색과 혈연적 관계에 힘입어 250년간 학맥을 이어갔으며, 특정 문호를 세우지 않고 주2를 지향하면서 실학(實學)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들은 양명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동시에 고증학(考證學)의 방법론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였고, 훈민정음 · 국어학 · 국사학 · 서법(書法) · 문자학 · 문헌학 분야에서 뛰어난 논저들을 남겼다.
서법에서는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국사학에서는 연려실(燃藜室) 이긍익(李肯翊)과 매천(梅泉) 황현(黃玹), 한학에서는 석천(石泉) 신작(申綽), 훈민정음 연구에서는 서파(西陂) 유희(柳喜), 문자학에서는 남정화(南廷和), 문헌학에서는 남극관(南克寬) 등이 두각을 나타냈으며, 여러 국학 분야의 선구자들 가운데 많은 인물들이 이 학파에 속한다. 본래 강화학파에 대해서는 정인보(鄭寅普)가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과 『국학산고(國學散藁)』에서 그 학문적 성과를 일정하게 평가한 바 있다.
강화학파는 소론(少論)의 가계를 통해 계승되었다. 영조 대의 탕평 정국에서는 소론도 일정하게 정계에 진출하였으나, 준소 계열은 전주 이씨 덕천군파(德泉君派)의 이진유(李眞儒)가 김일경 옥사에 연루되면서 영조 초기에 정치권에서 축출되었다. 이어 1755년(영조 31)의 나주괘서사건[을해옥사]으로 이진유의 후대인 이광신(李匡臣) · 이광려(李匡呂) · 이광찬(李匡贊) · 이광사 · 이광명(李匡明) 등이 모두 연좌되어 가문이 몰락하였다. 이들은 가난한 상황을 겪으면서 인간 존재의 본질적 문제를 새삼 탐구하게 되었고, 강화도로 이주하여 정제두의 양명학적 사유를 적극 수용하게 되었다.
이광신은 정제두 심학의 주3으로서, 정제두의 저술을 교정하고 선사(繕寫)하였으며, 「의주왕문답(擬朱王問答)」 · 「논정하곡학문설(論鄭霞谷學問說)」에서 정제두의 학문 성향을 정면으로 거론하고 그 계승자임을 밝혔다. 이광사는 『서결(書訣)』을 남기고 동국진체(東國晉體)를 확립한 서법가(書法家)이면서 동시에 강화학의 정신을 문학과 논문으로 표출한 문학가이자 사상가이다. 이에 비해 그의 종형제인 이광찬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광려는 양명의 학설을 숙지하고 있었으나, 양지설에 대해서는 『대학』의 본뜻은 아니라고 보는 등 다소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였다.
이광사의 둘째 아들인 이영익(李令翊)은 정제두의 손자사위가 되었는데, 그는 정제두의 심학을 비교적 충실하게 계승하였다. 이영익은 제종형제 이충익(李忠翊)과 함께 주학(朱學)과 왕학(王學)을 변석하고, 『상서』의 금고문(今古文) 문제를 논하는 등 지적 관심사를 확대하였다. 이충익은 왕학을 전공하였고 결국 불교에 심취해 『초원담로 椒園談老』를 이룬 데 비해, 이영익은 양명학을 자득해 주체의 존재 양식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의식의 ‘방랑(放浪)’을 염려하였다.
강화학파를 이룬 또 다른 가계(家系)는 평산 신씨(平山申氏)이다. 즉 신대우(申大羽)는 정제두의 손자사위로서, 강화도로 이주해 정제두의 학문을 이었다. 그도 정제두의 유집(遺集)을 정리하는 데 힘을 쏟았다. 다만 심학과 관련된 논문은 남기지 않고 산문 창작에 치중해, 인간의 문제를 문예적 산문으로 표현해 내었다. 신대우는 전내실기적인 삶을 실생활에서 추구하였고 함축성이 높은 산문 문학을 제창하였다. 신대우의 둘째 아들 신작(申綽)은 일생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면서 문헌 집성의 방법을 활용해 경학 연구의 수준을 높이 끌어올렸다. 조선 학술사에 유례 없는 박학(樸學)의 종(宗)이라 할 수 있다. 신작은 경학에서는 『시차고(詩次故)』 · 『역차고(易次故)』 · 『서차고(書次故)』의 삼차고를 저술하였고, 별도로 『춘추좌전례(春秋左傳例)』를 집필하고 『의례(儀禮)』를 주4하였다.
조선 후기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양명학을 수용한 학자 문인들은 많았지만, 강화학파는 그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해 자기 것으로 삼으면서 가학(家學)의 형태로 계승하였다는 점에서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 정제두는 이기(理氣)의 개념을 차용해 심(心)의 문제를 다루었지만, 이후의 강화학파 학자들은 이기론의 틀을 점차 벗어났다. 이광사가 「논동국언해토(論東國諺解吐)」에서 한글 언토(諺吐)에 관해 논한 것은 이후 강화학파의 학문이 국학으로 전회하는 기원이 되었다. 그들은 이후 박학(樸學)으로 학문적 관심을 넓혔고, 시문에서 올바른 인간상을 제시하고 자신의 삶을 그것에 부합시키려 했으며, 전통 가치와 학술 내용을 회의하고 재구성하였다.
개항기에 이르러 이건창(李建昌)과 황현은 우국의 정신을 담고 민족주의적 성격을 드러내었다. 강화학파의 덕천군파 가계는 철종이 등극하면서 이시원(李是遠)이 징사(徵士)로서 중앙 권력에 편입됨으로써 정치적으로 복권되었다. 판서직까지 지낸 이시원은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에 고령이면서도 아우 이지원(李止遠)과 함께 자결해 외침에 대한 대처를 촉구하였다. 이시원의 손자 이건창과 함께, 정원하(鄭元夏) · 홍승헌(洪承憲) · 이건승(李建昇) · 이건방(李建芳)이 정제두의 유풍을 흠모해 강화도로 모여 함께 강학을 하며 새로운 학문 방법과 현실 대처 방안을 토의하였다.
명성황후시해사건(明成皇后弑害事件) 때 이건창은 홍승헌 · 정원용(鄭元容)과 함께 궐문에 나아가 「청토복소(請討復疏)」를 올렸고, 당색의 제한 때문에 정치 이념을 구현하지 못하는 현실을 체험하고는 붕당정치사인 『당의통략(黨議通略)』을 집필하였다. 이건창의 아우 이건승은 황현과 교유한 문인으로, 이건창 · 이건방과 마찬가지로 갑오정국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을사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되자 홍승헌 · 정원하와 함께 자결을 결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건승은 1906년에 강화도 사기리(沙磯里)에 계명의숙(啓明義塾)을 설립해 교육 구국운동을 전개하였고,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지지하였다. 1910년에 국치를 당하자 정원하의 뒤를 따라 만주의 회인현(懷仁縣)으로 망명하였다. 이건창이 이은 조선 양명학의 정신, 민족 자주의 이념은 정인보에 의해 계승되어 큰 줄기를 이루었다. 강화학파는 양명학 일색은 아니다. 정인보가 강화학을 포함한 조선 양명학도의 존재를 지적하고 그 논리 구조를 밝히고자 했을 때는, 일제에 부용하는 학문 자세를 허학(虛學)으로 규정하고, 그것에 대한 비판적 힘으로서 양명학적 실학의 이념을 강조하려는 의도였을 따름이다.
이처럼 강화학파가 위기의 현실에 대응한 철학적 기초를 이루는 양명학적 논리는 무엇인가? 이 논리를 구성하는 이론을 검토하기 위해, 먼저 양명학의 기본 이념과 체계로부터 그 본질적 가치지향을 살핀 뒤, 정제두와 그 이후 양명학파 인물 가운데 이시원 · 이건창 · 이건방 · 정인보 등의 양명학적 사유를 정리하고자 한다.
양명학의 본령은 무엇보다 “마음이 바로 이치이다[心卽理]”라는 명제에 있다. 왕양명은 여기에서 리로서 마음의 본질을 양지(良知)로 보았다. 왕양명의 양지론에서 허령불매(虛靈不昧)한 양지는, 양명학이 주체적 · 역동적 철학으로 자리매김하는 근거가 되었다. 양지의 허령불매한 작용은 왕양명의 저술인 「대학문(大學問)」에 제시되어 있다. 「대학문」은 『대학』이 제시한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는 공부’인 수신(修身)을, 양지를 중심으로 격물 · 치지 · 성의 · 정심의 공부 순서로 전개한다. 이 일련의 공부 과정에서 양지는 의식구조 안에서 허(虛)의 존재론적 본체이자 령(靈)의 인식론적 작용으로서, 의념 작용의 본체이면서 동시에 의념 판단의 주체로 기능한다. 곧 의념의 선악을 감독하고 시비를 판단하며, 나아가 악을 제거하고 선으로 향하도록 이끄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허령불매의 양지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사태를 판단하고 선악을 구별하여 실행하는 실천적 지향성을 지닌다.
이러한 인성관과 세계관을 기초로, 개화기 및 일제강점기의 양명학자들은 시대적 위기에 직면하여 이에 대응하고자 여러 구체적 이론 방안을 제시하였다. 양명학을 가학의 기반으로 삼은 소론 계통의 강화학파 가운데 이시원은 유학의 생명인 ‘성인취의(成仁取義)’의 절의 정신을 몸소 구현하였다. 비록 엄밀한 의미에서 양명학 자체의 사례로만 국한되지는 않더라도, 강화학파 인물이 유학의 실천적 정신을 실행하였다는 점에서, 이는 실천을 우선하는 강화학파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예라 할 수 있다.
이건창은 ‘실심에 입각하여 실사에서 실천을 통해 실효를 거두는’ 강화학파의 정신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는 실심(實心)을 ‘성(誠)=실리(實理)=진심(眞心)’으로 이해하였으며, 실심을 토대로 실사에서 실천을 거쳐 실효를 얻고자 하는 강화학파의 정신을 자신의 학문 활동과 경세사상의 근본 원리로 삼았다. 이에 따라 그는 경세 방면에서 보수적 위정척사론을 거부하는 동시에 외세 의존적 개화론도 비판하며, 자주적 개혁론을 주장하였다.
이건방은 양명학의 이론적 기초 위에서 시대적 위기를 극복할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의 『원론(原論)』은 사회진화론을 바탕으로 당시 지식인들의 사회 인식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토대로 국가 부강론을 제시한 저술이다. 이건방의 『원론』은 당쟁의 원인을 정리한 이건창의 『원론』을 ‘가도의론(假道義論)’으로 종합하면서, 국가의 쇠락과 외세 침탈의 근본 원인을 설명하였다. 그는 구체적으로 거짓 도학의 실체를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이는 송시열과 노론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반적 정서를 근거로 진가를 판별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를 학문 · 정치 · 사회 전반에 대한 비판의 기준으로 삼고자 하였다.
정인보는 박은식의 진아론(眞我論)과 철학적 방법론 및 문제의식에 영향을 받았다. 박은식은 전통 이학(理學)이 본령 학문의 지위를 회복하여 철학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양명학적 수양 방법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후 그는 격물치지를 철학적 방법으로 수용하면서, 진아(眞我)를 인식과 실천의 철학적 주체로 규정하였다. 정인보는 양명학적 도덕 수양을 강조하기 위해 본심(本心)을 말하였으나, 점차 실심(實心)의 개념을 부각시켰다. 본심[양지]은 도덕적 판단과 가치론적 방향을 안내하지만, 구체적 인식과 실천을 위해서는 지각 작용을 지닌 주체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일진무가(一眞無假)’한 실심을 통해 민중을 보다 쉽게 각성시킬 수 있는 길을 열고자 하였다. 이러한 개념적 기초 위에서 그는 『양명학연론』을 저술하여 참된 유학을 회복하고,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민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학문을 펼쳤다. 그의 사유는 곧 조선학이자 실학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전개된 양명학 연구는 오늘날의 생태 · 기후 위기와 국제사회 전반의 사회문화적 위기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조선의 양명학자들이 보여 준 수시변역(隨時變易)과 권도(權道)의 주체성, 실심(實心)과 감통(感通)의 애민 및 실천 정신은, 과학기술 문명 속에서 그늘에 가려진 인문적 · 도덕적 실천을 회복하고 현실에 구현하는 데 중요한 자원이다. 이는 곧 조선시대 양명학 연구가 지향해야 할 미래적 목표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