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휘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경상도관찰사, 형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정춘(靜春)
장주(長洲), 천상(川上)
시호
장익(章翼)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71년(선조 4)
사망 연도
1644년(인조 22)
본관
해평(海平: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
주요 관직
병조정랑|사간|경상도 관찰사|공조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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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경상도관찰사, 형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정춘(靜春), 호는 장주(長洲)·천상(川上). 증찬성 윤희림(尹希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자감정 윤변(尹忭)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이며, 어머니는 참봉 황대용(黃大用)의 딸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9년(선조 22) 진사가 되고, 1594년 별시문과에 문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다가 1596년 병조좌랑이 되었다. 이듬해 병조정랑이 되고 이어 사서·장령·필선·사간 등을 거쳐, 전라도·경상도 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에 관련, 벼슬에서 쫓겨났다가 뒤에 다시 기용되었고, 1618년 동지 겸 진주사(冬至兼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공조·예조의 참판을 거쳐,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때 장흥·아산 등지에 유배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기용되어 한성부좌윤·청주목사, 호조와 형조의 참판을 지냈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하고, 특명전권대사로 적진에 출입하면서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환도 후 도승지에 임명되어 청나라와의 외교를 전담하였고, 한성부판윤·형조판서를 거쳐 1639년 우찬성으로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고, 1641년 공조판서가 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죽은 뒤 아들 윤면지(尹勉之)의 공훈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장익(章翼)이다. 저서로 『장주집』이 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동주집(東州集)』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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