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완정은 북한에서 사회주의체제로 한반도 전역을 완전히 통일하는 것을 가리키는 북한용어이다. 북한정권 수립 다음 날인 1948년 9월 10일 김일성이 발표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정강’에 처음 등장했다. 1948∼1950년 초 국토완정은 남한에 대한 북한의 무력적인 통일정책을 의미했다. 김일성은 국토완정을 달성하기 위해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시작했다. 1960년대에 들어 국토완정은 남조선혁명노선과 3대 혁명역량 강화론으로 전환된다. 국토완정의 목표는 한국전쟁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시켰다.
국토완정은 북한의 『조선말대사전』에 따르면 “한 나라의 령토를 단일한 주권밑에 완전히 통일하는 것”이다. 국토완정은 북한체제로 한반도 전 국토를 완전히 정리하겠다는 의미이며, 북한은 국토완정과 통일을 동일시하고 있다.
국토완정은 북한정권 수립 다음 날인 1948년 9월 10일 김일성이 발표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정강(政綱)’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이후 국토완정은 1949년 신년사를 통해 북한의 통일방안으로 공고화되었으며, 1950년 신년사에서도 역시 강조되었다.
국토완정은 1948∼1950년 초를 거치면서 점차 남한에 대한 북한의 무력적인 통일정책의 의미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후 김일성은 국토완정을 달성하기 위해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시작하였다.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정강’ 제1항에서 “국토의 완정과 민족의 통일을 보장하는 가장 절박한 조건”으로 미국과 소련 군대의 동시 철수를 내세웠다. 이 정강에서 김일성은 분단은 남조선 민족반역자들 때문이며 남조선정부는 제국주의의 괴뢰정부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통일은 남한에 북한식의 체제를 이식하는 것이며, 미소양군의 동시철수가 국토완정과 통일의 선결조건임을 주장하였다.
국토완정은 1949년 신년사를 통해 북한의 공식적 통일방안으로 전면적으로 등장하였다. 김일성은 신년사를 통해 “모든 것을 국토완정을 위해서 바치자”라고 역설하면서, 노동자와 농민을 비롯한 모든 인민들에게 국토완정을 위해 강력한 민주기지건설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였다.
국토완정은 북한 혁명전술의 커다란 변화를 의미한다. 북한은 해방 이후 혁명이론으로 민주기지론을 제시하였다. 민주기지론이란 전 한반도를 사회주의화 시키기 위해 북한지역에 먼저 공산주의 기지를 건설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국토완정론의 등장은 민주기지론에 입각한 북한지역의 사회주의 구축이 완료됨에 따라 이제 전 한반도의 사회주의화를 통한 통일을 추구하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김일성은 국토완정을 달성하기 위해 북한의 군사력을 증가시키는 한편 1949년과 1950년 두 차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으로부터 남침에 대한 승인과 전쟁지원을 약속받았다. 김일성은 1949년 4월 22일 최고인민회의에서 ‘소련 방문활동 경과보고’를 보고하면서 조․소경제, 문화협정으로 국토완정의 투쟁에 거대한 힘을 얻었다고 강조했다. 소련 방문 이후 김일성은 무장게릴라 남파 등의 폭력도발을 통해 남한 군사력의 분산과 사회혼란을 조성하는 가운데, 1950년 6월 25일 ‘민족해방전쟁’이란 명분하에 국토완정을 달성하고자 전면적인 남침을 감행하였다.
한반도 전역에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국토완정의 목표는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참전으로 좌절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은 무력을 통한 국토완정을 또다시 추구하는 것이 어렵다는 판단하에 1960년대에 들어 남조선혁명노선과 3대 혁명역량 강화론으로 전환하게 된다.
국토완정은 북한정권 수립 이후 제시된 북한의 통일방안으로 무력에 의한 남한 정복을 통해 한반도 전역에 북한식 사회주의체제를 이식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러한 국토완정의 목표는 결국 한국전쟁이라는 무력충돌로 이어졌으며 이는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