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유가의 근본이념을 명확하고도 일관된 체계로 정립한 유교 경전이다. 송나라 때 주희가 새로운 유학의 체계를 세우면서 『예기』에서 『중용』과 『대학』의 두 편을 독립시켜 사서 중심의 체재를 확립하였다. 주희는 『대학』에 장구를 짓고 자세한 해설을 붙여 경문 1장, 전문 10장으로 나누었다. 『대학』의 내용은 삼강령과 팔조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강령은 명명덕, 신민, 지어지선이고, 팔조목은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이다. 『대학』의 저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중국에서 유교가 국교로 채택된 한(漢)대 이래 오경이 기본 경전으로 전해지다가 송대에 주희(朱熹)가 당시 번성하던 불교와 도교에 맞서는 새로운 유학(性理學)의 체계를 세우면서 『예기』에서 『중용』과 『대학』의 두 편을 독립시켜 사서 중심의 체재를 확립하였다.
49편으로 구성된 『예기』 중 제42편이 『대학』에 해당한다. 주희는 『대학』에 장구(章句)를 짓고 자세한 해설을 붙이는 한편, 착간(錯簡)을 바로잡았다. 그는 전체를 경(經) 1장, 전(傳) 10장으로 나누어 ‘경’은 공자(孔子)의 사상을 제자 증자(曾子)가 기술한 것이고, ‘전’은 증자의 생각을 그의 문인이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다.
『대학』의 저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전통적으로는 『중용』과 『대학』이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공자세가(孔子世家)」에는 송나라에서 급(伋)이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한나라 때 학자인 가규(賈逵)도 공급(孔伋)이 송에서 『대학』을 경(經)으로 삼고 『중용』을 위(緯)로 삼아 지었다고 하며, 정현(鄭玄)도 이 설을 지지하고, 송대의 정호(程顥) · 정이(程頤)는 “공씨가 남긴 책”이라고만 언급하였다.
주희는 전을 “증자의 사상을 그의 문인이 기술한 것이다.”라 하였는데, 자사가 바로 증자의 문인이기 때문에 그의 주장도 『대학』은 자사의 저작이라는 견해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청(淸)대에 오면 실증적 · 고증적으로 검토, 비판하는 학풍이 일어나면서, 종래의 자사 저작설도 비판되어 진 한(秦漢) 사이에 또는 전국시대 어느 사상가의 저작이라는 설, 자사가 지은 것이 틀림없다는 설 등이 있으나, 유가의 학자가 지은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일치한다.
『대학』의 내용은 삼강령 팔조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강령은 모든 이론의 으뜸이 되는 큰 줄거리라는 뜻을 지니며, 명명덕(明明德) · 신민[新民 · 親民] · 지어지선(止於至善)이 이에 해당되고, 팔조목은 격물(格物) · 치지(致知) · 성의(誠意) · 정심(正心) · 수신(修身) · 제가(齊家)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를 말한다.
『대학』은 『예기』 가운데 한 편의 형태로 우리 나라에 들어왔을 것이라 추측된다. 7세기경의 신라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는 『예기』를 『시경』 · 『서경』과 함께 습득할 것을 맹세하는 화랑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372년(소수림왕 2)에 세운 태학(太學)을 관장한 사람이 오경박사(五經博士)였으니, 고구려에서도 일찍부터 『예기』가 교수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기에도 국학 3과정과 독서삼품과의 과목으로 『예기』는 중요시된 경전이었다.
고려 유교의 학풍은 경전중심이어서 예종 때의 국학 칠재와 사학(私學) 등에서도 경연의 주요과목으로 『예기』가 자주 강론되었다. 조선 태조는 『대학』의 체재를 제왕의 정치귀감으로 편찬한 송대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유창(劉敞 : 초명은 敬)으로 하여금 진강(進講)하게 하였다. 그 뒤 『대학연의』를 어전에서 강의하는 전통이 마련되었다.
주희가 독립시킨 『대학』은 1419년(세종 1) 『성리대전』 · 『사서오경대전』이 명나라로부터 수입될 때 함께 들어왔다. 주희의 「대학장구」에 대한 최초의 비판은 이언적(李彦迪)에서 비롯된다. 그는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에서 주희의 일경십전(一經十傳)을 일경구전(一經九傳)으로 산정(刪正)하면서 편차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주자학이 관학으로 정립되고 성현의 편언척구(片言隻句)가 신성시되던 조선 중기에는 주희의 체계를 긍정한 바탕에서 나름의 해석을 모색하는 데 그쳤다.
이와 같은 고식적인 풍토에 반발한 윤휴(尹鑴)는 『대학고본별록(大學古本別錄)』과 『대학전편대지안설( 大學全篇大旨按說)』에서 주희의 방법론적 준거였던 ‘격물’이 지적 탐구가 아니라, 종교적 경건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본래 『예기』 안에 있던 『대학고본』이 아무런 착간도 없는 정본(定本)임을 주장하였다. 박세당(朴世堂)은 『대학사변록(大學思辨錄)』에서 철저한 고증에 의해 『대학』이 복원되어야 하며, 주희가 가한 해석이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고 고답적이라 비판하면서, 구체적 실천의 관점을 강조하였다.
정약용(丁若鏞)은 정조와의 문답을 정리한 『대학강의(大學講義)』, 그리고 『고본대학』에 입각해 『대학』 본래의 정신을 탐색한 『대학공의(大學公議)』를 저술해 명명덕 · 신민만으로도 강령이 될 수 있으며 격물 · 치지는 팔조목에 들 수 없다 하여, 격물 · 치지에 입각한 성리학적 사유의 재검토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삼국시대에 『예기』는 이미 유포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그 유입과 전파경로는 알 수 없다. 1045년(정종 11) 왕이 당나라의 공영달(孔穎達)이 찬한 『신간예기정의』 한 질을 어서각(御書閣)에 두고 나머지는 문신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주희의 『대학장구』가 처음 반입된 것은 고려 공민왕 19년(1370) 명나라에서 『대통력』 · 『육경』 · 『통감』과 함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다.
1423년(세종 5) 『대학』을 포함한 사서오경 10부를 성균관 · 오부학당에 분급(分給)하였고, 1435년 각 도의 수령에게 명하여 그것을 향교에 비치하라고 하였다. 개인이 자비로 갖추고자 할 때는 종이를 보내면 주자소에서 찍어주게 하였다. 15세기 말 함경도 · 평안도 · 제주도에까지 『대학』이 보급되었다. 선조 때부터 진행된 언해사업은 1576년(선조 9) 이이(李珥)가 왕명을 받아 13년 만에 완성, 간행하여 도산서원에 하사되었으며, 1605년에 재반포되어 널리 읽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