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비석의 첫머리에 ‘임신(壬申)’이라는 간지(干支)가 새겨져 있고, 또한 내용 중에 충성을 서약하는 글귀가 자주 보이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1934년경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 석장사(石丈寺)터 부근에서 발견되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석은 길이 약 30㎝, 너비는 윗부분이 12.5㎝이나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여기에 다섯 줄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74자가 새겨져 있다. “壬申年六月十六日 二人幷誓記 天前誓 今自三年以後 忠道執持 過失无誓 若此事失 天大罪得誓 若國不安大亂世 可容行誓之 又別先辛未年 七月卄二日 大誓 詩尙書禮傳倫得誓三年(임신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해 기록한다. 하늘 앞에 맹세한다. 지금부터 3년 이후에 충도를 집지하고 허물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일, 이 서약을 어기면 하늘에 큰 죄를 지는 것이라고 맹세한다. 만일, 나라가 편안하지 않고 크게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모름지기 충도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한, 따로 앞서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였다. 즉, 시·상서·예기·전(左傳 혹은 春秋傳의 어느 하나일 것으로 짐작됨.)을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세하되 3년으로써 하였다).”
비문에 보이는 임신년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비문내용 중에 『시경』·『상서』·『예기』 등 신라 국학의 주요한 교과목의 습득을 맹세한 점으로 보아, 651년(진덕여왕 5) 국학이 설치되고 한층 체제를 갖춘 682년(신문왕 2) 이후의 어느 임신년, 아마도 732년(성덕왕 31)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국학이 생겨나기 이전부터 유교경전이 신라에 수용되었을 것이라는 점, 특히 비문내용 중에 충도를 실천할 것을 맹세한 점, 나아가 이것이 화랑도의 근본정신인 점을 고려해 화랑도가 융성했던 중고(中古) 후반의 어느 임신년, 즉 552년(진흥왕 13) 또는 612년(진평왕 34)의 어느 한 해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보다 유력하다.
그 제작연대는 차치하고라도 신라 융성기에 청소년들의 강렬한 유교도덕 실천사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