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적은 조선전기 예조판서, 형조판서, 좌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1491년(성종 22)에 태어나 1553년(명종 8)에 사망했다.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7년간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복직 후 좌찬성에 이르렀으나 을사사화가 발생하여 추국하는 역할이 주어지자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양재역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유배됐고 유배지에서 많은 저술을 남긴 후 세상을 떴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에게 전해준 인물이다.
경상북도 경주 출신. 본관은 여강(驪江: 여주(驪州)). 초명은 이적(李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였다.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 · 자계옹(紫溪翁). 회재라는 호는 회암(晦菴: 주희의 호)의 학문을 따른다는 견해를 보여준 것이다. 할아버지는 참군 이수회(李壽會)이고, 아버지는 생원 이번(李蕃)이며, 어머니는 경주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의 딸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李滉)에게 전해주었다.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 · 사헌부장령 · 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 사간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하자 종부시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 · 응교 · 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에 나가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때 조정에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이조 · 예조 · 형조의 판서를 거쳐 1545년(명종 즉위년) 좌찬성이 되었다. 이때 윤원형(尹元衡)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선비들을 심문하는 추관(推官)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명종 2)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긴 후 세상을 떠났다.
이언적은 사화가 거듭되는 사림의 시련기에 살았던 선비로서, 을사사화 때는 좌찬성 · 판의금부사의 중요한 직책으로 사림과 권력층 간신 사이에서 억울한 사림의 희생을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사화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후에 이이(李珥)는 이언적이 을사사화에 곧은 말로 항거하며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하였으나, 오히려 이언적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하였던 인물이다.
이언적은 1517년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토론되었던 성리학의 기본쟁점인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에 뛰어들었고,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를 바탕으로 두 학자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여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이언적이 벌인 태극의 개념에 관한 논쟁은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개념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언적은 이 논쟁에서 이기론(理氣論)의 주리론적 견해로서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은 이황(李滉)에게로 계승되는 영남학파의 성리설에 선구가 되었다.
이언적은 만년에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구인록(求仁錄)』(1550) ·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1549) ·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1553) · 『봉선잡의(奉先雜儀)』(1550) 등의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
『구인록』(4권)은 유교 경전의 핵심 개념인 인(仁)에 대한 이언적의 집중적인 관심을 보여준다. 이언적은 유교의 여러 경전과 송대 도학자들의 설을 통해 인의 본체와 실현 방법에 관한 유학의 근본정신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대학장구보유』(1권)와 『속대학혹문』(1권)은 주희의 『대학장구』와 『대학혹문』의 범위를 넘어서려는 이언적의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보여준다. 이언적은 주희가 『대학장구』에서 제시한 체계를 개편했고, 특히 주희가 역점을 두었던 격물치지보망장(格物致知補亡章)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대학장구』의 경1장에 들어 있는 두 구절을 격물치지장으로 옮겼으며, 이런 개편에 대해서 주희가 다시 나오더라도 이것을 따를 것이라는 확신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이언적의 태도는 주희의 한 글자 한 구절을 금과옥조로 삼아 존숭하는 후기 도학자들의 학문 태도에 비해 훨씬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학문 정신을 보여준다.
『중용구경연의』(29권)는 미완성 저술로 주희의 『중용장구』와 『중용혹문』의 체계를 벗어나 천하국가를 통치하는 방법인 9경(九經: 수신(修身) · 존현(尊賢) · 친친(親親) · 경대신(敬大臣) · 체군신(體群臣) · 자서민(子庶民) · 내백공(來百工) · 유원인(柔遠人) · 회제후(懷諸侯))을 중심으로 『중용』의 정신을 밝히려는 독창적인 저술이다. 이는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가 『대학』 체계를 통치 원리의 구체적 실현 방법에 응용했던 것에 상응하며, 후에 이현일(李玄逸)이 『홍범연의(洪範衍義)』를 저술한 것에 선행한다고 할 수 있다.
이언적은 주희가 『대학』과 『중용』을 표출시킨 의도를 계승하면서도 『대학』과 『중용』의 정신을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양면으로 파악함으로써 도학의 통치 원리를 선명하게 제시하는 창의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봉선잡의』(2권)는 도학의 실천적 규범인 예서를 제시한 것으로서 조선 후기 예학파의 선구가 되고 있다. 주희의 『가례(家禮)』가 조선조 사회에 미친 영향을 주목한다면, 이언적의 예학 저술은 이언적의 학문적 관심이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보여준다.
이언적이 왕에게 올렸던 상소문인 「일강십목소」와 「진수팔규(進修八規)」는 군주 사회의 통치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하늘의 도리에 순응하고 백성의 마음을 바로잡으며 나라의 근본을 배양해야 한다는 왕도정치의 기본 이념을 추구했으며, 도학적 경세론의 압축된 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일강십목소」에서는 ‘임금의 마음씀[人主之心術]’을 근본 강령으로 규정하고, 가정 법도의 엄숙, 국가 근본의 배양, 조정 기강의 정대, 인재 취사의 신중, 하늘 도리에 순응, 언로를 넓힘, 사치 욕심의 경계, 군자의 길을 닦음, 일의 기미를 살핌을 도모하도록 요구하였다. 또한 1517년 저술한 「오잠(五箴)」에서도 하늘을 두려워함[畏天], 마음을 배양함[養心], 공경하는 마음[敬心], 허물을 고침[改過], 의지를 독실하게 함[篤志]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이언적은 하늘[天道 · 天心]과 백성[人心]에 순응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養心 · 敬心]에 힘쓸 것을 중요시하는 도학적 수양론을 경세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1569년(선조 2) 종묘(宗廟)의 명종(明宗)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종사되었고,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