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일장(日章), 호는 송재(松齋). 손현검(孫玄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손등(孫登)이고, 아버지는 증 병조참판 손사성(孫士晟)이다. 어머니는 권명리(權明理)의 딸이다.
1459년(세조 5)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보직되었다. 1463년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로 있을 때, 문예시(文藝試)에 장원하여 한 자급(資級) 특진되었다. 1464년 정월 『의방유취(醫方類聚)』의 교정을 잘못 보아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 해 7월 집현전을 폐지하고 예문관이 대신하도록 했을 때, 겸예문관이 되었다가 11월에 병조좌랑을 거쳐 종묘서령(宗廟署令)이 되었다.
1467년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평노장군(平虜將軍) 박중선(朴仲善)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군무(軍務)를 관장, 평정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책훈되고 내섬시정(內贍寺正)으로 특진되었다. 1469년(예종 1) 성주목사를 거쳐 공조참의와 안동부사를 역임하고 계림군(雞林君)에 봉해졌다.
1476년 11월 진주목사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전리(田里)로 돌아갔으나, 왕이 특명으로 녹봉(祿俸)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청렴결백하고 백성을 다스리되 친자식같이 하였다.
일찍이 성주목사로 있을 때 기근이 극심하게 들었으나 극진한 마음으로 구휼하여 희생자가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그 곳 이민(里民)의 호소로 임기가 연장되기도 하는 등 목민관의 모범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여 성주·진주·안동 등의 외관직은 경주에 있는 노부를 봉양하기 위해 자원하여 왕의 특지(特旨)로 임명된 벼슬이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시호는 양민(襄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