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망기당(忘機堂). 할아버지는 조상치(曺尙治)이다.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의 유생이 되었으나, 1473년(성종 4) 생원 임지(任沚)·최희철(崔希哲) 등과 함께 성균관 관원들을 배척하고 동맹 휴학을 했다가 장형(杖刑)을 받고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이후 많은 경전을 두루 섭렵하며 학문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마침내 명유(名儒)가 되었다. 특히, 성리학에 깊이 침잠했으며, 불학(佛學)에도 이해가 깊었다.
1518년(중종 13) 경부터 시작된 후배 학자인 이언적(李彦迪)과의 성리학에 관한 논쟁은 우리나라 초유의 것으로 학계의 주목을 많이 끌어 왔다. 조한보의 학문과 사상은 이언적의 문집인 『회재집(晦齋集)』에 수록된 서찰 등에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데, 대체로 도교나 불교 사상에 가까운 경향을 보이고 있다.
조한보는 존양(存養)을 말함에 있어 “심(心)이 무극의 경지에 소유(逍遊)해 허령의 본체로 하여금 내 마음의 주인으로 삼는다.(遊心於無極之眞, 使虛靈之本體, 作得吾心之主)”, “천지만물로 하여금 나를 조종(朝宗)하게 해 운용에 막힘이 없게 한다.(使天地萬物朝宗於我, 而運用無滯)”, “무극태허로써 오심(吾心)의 주(主)로 한다.(以無極太虛之體, 作得吾心之主).”라고 하여 도가 사상에 가까운 경지를 취하였다.
수양 공부의 방법으로는 “경(敬)을 주하여 심(心)을 존(存)함으로써 위로는 천리에 달한다.(主敬存心, 而上達天理)”라고 하여 선가(禪家)의 돈오(頓悟)에 가까운 견해를 취하고 있었다. 또한, 태극을 무극태허로 해석하고 “태허의 본체는 본래 적멸이다.(太虛之體本來寂滅)”라고 하여 불가의 진여적멸(眞如寂滅)의 열반경(涅槃境)을 태허의 본체, 즉 도체(道體)로 보았다.
조한보의 이와 같은 학설은 이언적으로부터 유자(儒者)의 설이 아니라고 날카로운 비판을 받았다. 이언적은 태극 위에 다시 무극이라는 것이 있다고 할 수 없으며, 도나 태극은 지고지묘(至高至妙)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근지실(至近至實)한 데 있기 때문에 이단(異端)의 공적(空寂)에서는 구할 수 없다는 말로 그의 학설에 이의를 제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