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유씨(江陵劉氏)의 시조. 초명은 유경(劉敬). 자는 맹의(孟儀), 호는 선암(仙庵). 강릉부 우계현(羽溪縣) 출신. 아버지는 지군사(知郡事) 유천봉(劉天鳳)이다.
1371년(공민왕 20)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학유(成均學諭)가 되고, 박사(博士)와 문하주서(門下注書)를 역임하였다. 1375년(우왕 1)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가 되고, 전공좌랑(典工佐郎) · 예의정랑(禮儀正郎) · 군부정랑(軍簿正郎)을 거쳐, 1389년(공양왕 1) 성균사예, 이어 호조의랑(戶曹議郎) · 성균좨주를 역임하였다.
1392년 7월 태조가 조선을 세울 때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으로 책록되고 성균관대사성과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등을 역임했다. 1393년(태조 2) 중추원좌부승지, 다음해 중추원부사를 지내고 옥성군(玉城君)에 봉해졌으며,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가 되었다.
1401년(태종 1) 승녕부윤(承寧府尹)으로 소요산에 들어간 태조를 찾아가 귀경을 권유했으며, 예문관대제학 ·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 등을 지냈다. 1408년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 태조가 죽자, 수묘관(守墓官)이 되어 3년 간 능을 지켰다.
1410년 길주도찰리사(吉州道察理使)로 나갔다가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 등을 지낸 뒤 1413년 세자이사(世子貳師)가 되고, 1416년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1421년(세종 3) 궤장(几杖)을 상으로 받았다.
이성계(李成桂)와 일찍부터 사귀어 이성계에게 경사(經史)를 강론했으며, 특히 송나라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즐겨 강론해 세도(世道)를 만회할 뜻을 품게 하였다. 개국 후에도 대사성에 있으면서 『대학연의』를 여러 차례 강의했다.
1393년에 좌산기상시로 있으면서 사직해 선술(仙術)을 공부하겠다고 요청하자, 태조는 “선(仙)을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군부(君父)를 버리는데, 그대가 나를 버리면 불충이 되고, 어버이를 버리면 불효가 될 것이다. 그대가 선을 배우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가?” 하고 만류하였다.
성격이 온유돈후(溫柔敦厚)하고, 언행이 근독(謹篤)하며, 지위가 높을수록 마음이 겸손해 사람들이 당나라의 누사덕(婁師德)에 비유하였다. 저서로 『선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