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成均館)의 장(長)으로 정3품 당상관직이며, 정원은 1인이다. 성균관은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국학(國學)이라 하며 학궁(學宮) 혹은 반궁(泮宮)이라고도 하였다.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고려 충렬왕 때부터 사용하던 것을 이어 받은 것이다. 조선을 건국한 후 한양에 새로 짓기 시작하여 1398년(태조 7)에 완성되었다.
대사성은 고려 말 공민왕 대에도 정3품 관직이었으며, 정원은 1명이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성균관 직제가 『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법제화되기 전까지 그 명칭과 인원의 변화가 잦았던 데 비해 대사성은 큰 변화와 조정은 없었다. 다만, 정3품의 관품이 1466년(세조 12)에 정3품 당상관으로 승격되었고, 이대로 법제화되었다.
그러나 1658년(효종 9)에 산림직으로 좨주(祭酒)가 정3품 당상관으로 설치되면서 대사성은 좨주와 함께 성균관 최고의 관직 지위를 공유하게 되었다. 좨주에 명망 있는 산림이 임용되었던 만큼 상대적으로 대사성의 위상은 축소되었다고 볼 수 있다.
대사성은 유학(儒學) 교육의 임무를 책임지던 성균관의 장이었기 때문에 문관(文官)을 임명하는 규정이 있었으며, 실제로 문과(文科) 출신이 임명될 수 있었다. 성균관은 풍속 교화와 인재 양성의 최고 교육기관이었고, 그 막중한 임무가 대사성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법제적인 자격과 더불어 자질도 임용에 중요한 요소였다.
대사성은 경학(經學)에 능통하고, 어질고 덕이 있으며, 나이와 경험이 많은 인물이 임용되었다. 대사성을 임명할 때에는 자격과 자질을 가진 관리로 ‘사유록(師儒錄)’을 작성하여 여기에 등재된 인물 중 삼망(三望) 혹은 단망(單望)으로 임명하거나 왕이 특지(特旨)를 통해 발탁하기도 하였다.
대사성을 임명할 때 당시 국왕의 성향과 정치 세력의 동향에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이는 성균관이 예비 관료들을 교육하는 기관으로 정치 세력 기반 확장에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대사성은 당상관이기 때문에 근무 일수를 채워서 승진하는 순자법(循資法)을 적용받지 않았다. 다만 관직의 중요성 때문에 성균관 정5품 직강(直講) 이상은 구임(久任)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대사성의 임기도 구임으로 하였는데, 이는 성균관 교육의 발전을 위한 조처였다. 그렇지만 실제 임기는 그리 오래 유지되지 않았으며, 이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심화하였다.
대사성은 성균관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그 임무는 유생(儒生)들을 지도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학업과 관련하여서는 유생들을 가르치고 평가하는 업무를 수행하였고, 학업 이외에도 유생들의 생활과 관련하여 발생하는 여러 상황을 해결하였다.
대사성은 성균관 내 행정 업무를 관리하는 일을 담당하여 유생들이 받는 원점(圓點) 명단을 검토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관시(館試) 운영에 참여하여 해마다 서울과 지방의 유생들에게 취재(取才)를 시행하여 그들의 점수를 계산하여 식년시 문과 복시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또한 사학(四學) 유생들을 과시(課試)하여 식년시 생원 · 진사시에 응시하도록 하였고, 사학합제(四學合製)에서 시취(試取)하여 역시 소과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한편 대사성은 성균관에서 열리는 석전제(釋奠祭)를 준비하고 아헌관(亞獻官)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대사성은 성균관 관원들의 포폄(褒貶)을 시행하여 이를 담당 관서인 예조(禮曹)에 보고하는 업무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