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원자(元子) · 원손(元孫)의 보양을 담당하는 관직이다. 이들은 원자와 원손의 교육과 보도(輔導), 그리고 보육을 담당하였다. 보양관의 소속 관청은 보양청(輔養廳)과 강학청(講學廳)이었다. 원자 보양관은 정1품에서 종2품의 관원 3명이 임명되었으며, 원손 보양관은 종2품에서 정3품 당상관 2명이 담당하였다. 보양관 임용은 이조(吏曹)에서 대신(大臣)에게 문의한 후 왕의 재가를 얻어 선발하였다.
원자와 원손은 왕위 계승자이며, 책봉을 통해 왕세자 · 왕세손이 되어 동궁(東宮)이 된다. 원자가 태어나면 세자시강원에 보양청을 설치하고, 원손이 태어나면 궁궐 내 관서를 정하여 보양청을 설치하였다. 원자와 원손이 책을 읽을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강학청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보양관은 이러한 보양청과 강학청 소속 관원으로 원자 · 원손의 사부(師傅)였다.
교육을 위하여 관리를 둔 것은 태종 대였다. 1404년(태종 4)에 원자였던 양녕대군의 교육을 위하여 유선(諭善) · 시학(侍學) · 시직(侍直)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그렇지만 보양관의 관직이 등장한 것은 중종 대였다. 1518년(중종 13)에 중종은 원자 보양관으로 삼정승을 임명하여 후에 인종이 된 당시 원자에게 『소학(小學)』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명종 대에도 이러한 전례를 따라 재상을 원자 보양관에 임명하였다.
인조는 1623년(인조 1)에 반정으로 즉위하여 원자가 책봉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보양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오윤겸(吳允謙) · 이정귀(李廷龜) · 정엽(鄭曄) · 정경세(鄭經世)를 보양관에 임명하였으며, 김장생(金長生)과 장현광(張顯光)을 요속으로 삼았다. 1643년(인조 21)에는 원손 보양관을 두기로 하고 조익(趙翼) · 이식(李植) · 이목(李楘) · 김육(金堉)을 보양관으로 삼았으며, 김육은 심양으로 가게 된 원손을 보양관으로서 호종하여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후 이경석(李景奭)도 원손 보양관에 임명되었다.
현종 대에는 원자 강학청을 설치하여 보양관의 소속 관청을 정하도록 하였다. 1665년(현종 6)에 후에 숙종이 된 당시 5세 원자의 보양을 위하여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 · 김수항(金壽恒) · 김좌명(金佐明)이 보양관에 임명되었다. 이들 중 김좌명은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明聖王后)의 백부로, 논란은 있었지만 왕의 외척을 보양관에 임명하여 원자를 보도하려는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그리고 보양관이 소속된 아문으로 강학청을 설치하였고, 보양관들과 원자의 상견례(相見禮)를 처음으로 시행하였으며, 강학청 규례도 정비하였다. 숙종 대에는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직후였던 관계로 남인(南人) 이관징(李觀徵) · 민암(閔黯) · 이현일(李玄逸)을 원자 보양관에 임명하였다. 이때 후에 경종이 된 원자는 원자로 책봉된 지 7개월이 되었으며, 아문으로 원자 보양청을 설치하였다. 보양청은 강학청에서 교육하기에 더욱 어린 영아기 원자의 보양기관이었던 것이다.
보양관은 왕위 계승자가 될 원자와 원손의 교육과 보도를 담당하는 중요한 임무를 가지고 있기에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직책이었다. 그러므로 정치적 상황과 연계되어 보양관이 임명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