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하고 예절을 잘 지켰으며, 13세에 어머니상을 당해서도 의식과 예절에 어긋남이 없었다 한다. 성혼(成渾) ·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나가 학문을 배우고 의리를 깨달았다.
1603년( 선조 36)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중 스승 성혼이 정인홍(鄭仁弘) 등의 무고로 관작을 추탈당한 사실에 분개해, 1608년 성균관 유생 500여 인과 지방 유생들과 함께 신원(伸寃)을 소청하였다. 또 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는 정인홍을 청금록(靑衿錄: 성균관 · 향교 · 서원등에 비치된 유생 명부)에서 삭제하도록 하였다.
1612년( 광해군 4)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 · 병조좌랑 등을 역임하다가 1615년 간신들의 무고로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과 함께 출사해, 정언 · 수찬 · 교리 등을 지냈다. 1624년( 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로 왕을 호종(扈從)하고, 반정공신 이귀(李貴)를 패전의 죄로 탄핵해 목베기를 청하였다.
1626년 대사간에 승진하고, 다음 해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도로 왕을 호종했으며, 그 뒤 부제학 · 형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겨울 병자호란 때에 남한산성으로 왕을 호종해, 협수사(協守使)로 성 위에 올라가 지키며, 모진 풍설에도 게을리하는 일이 없었고 화의를 적극 배척했다 한다. 환도 뒤에, 윤황(尹煌) 등이 척화한 일로 유배되자 글을 올려 자핵(自劾)하고 물러났다.
학문이 깊고 지조가 있으며, 유학자 김집(金集)과 친해 모든 일을 의논해서 처리하였다. 뒤에 다시 왕의 부름을 받아 대사헌 ·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등을 역임하고, 1643년 부제학으로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을 겸임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저서로는 『 송교유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