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덕요(德耀), 호는 팔송(八松). 충청병마절도사 윤선지(尹先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돈(尹暾)이다. 아버지는 윤창세(尹昌世)이며, 어머니는 부제학(副提學) 경혼(慶渾)의 딸이다. 윤전(尹烇)의 형이다.
1597년(선조 30)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에 임명되었다. 1599년 주서로 입시한 뒤 군자감첨정 · 성균관전적을 거쳐, 1601년에 감찰이 되었으며 곧 정언으로 옮겼다.
이 때 홍문관은 중요한 부서이므로 은상(恩賞)으로 사사로이 임명할 수 없다는 것과 척신의 직을 파할 것을 주장했으며, 이 후 병조 · 예조의 좌랑, 예조정랑을 거쳐 북청판관으로 나갔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북청판관으로 혼인한 자제를 거느리고 관아에 머물고 있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며,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해지자 시골에 은거하였다.
1626년(인조 4) 사간 · 보덕 등을 역임했으며, 이듬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주화(主和)를 반대해 이귀(李貴) ·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론자의 유배를 청하고, 항장(降將)은 참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주화는 항복이라고 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삭탈관직되어 유배의 명을 받았으나 삼사의 구원으로 화를 면하였다.
이듬해 다시 사간이 되었고 길주목사 · 안변부사 · 사성 · 승지 · 대사성 등을 거쳐 1635년 대사간에 이르렀다. 이 때 전란으로 어려워진 백성의 구급책에 대해 의견을 제시했으며, 이 후 이조참의를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정묘호란 때와 같이 척화를 주장하였다. 부제학 전식과 집의 채유후가 상소를 올려 정죄함이 불가하다 하니 인조 또한 “부박(浮薄)한 풍습은 통렬히 징계해 다스리지 않을 수 없어 이에 죄를 정한 것”이라 하였다. 영동군에 유배되었다가 병으로 풀려 나와 죽었다.
사람됨이 강의(剛毅)하고 기절(氣節)이 있다는 평을 들었다. 영광의 용계사우(龍溪祠宇), 영동의 초강서원(草江書院), 노성의 노강서원(魯岡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팔송봉사(八松封事)』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