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11대 국왕 중종(中宗) 후궁이다. 중종의 서장자(庶長子) 복성군(福城君) 이미(李嵋)를 낳았고, ‘작서(灼鼠)의 변’으로 사사(賜死)되었다. 본관은 순천(順天), 아버지는 박수림(朴秀林)이다. 박수림은 상주(尙州)의 사족이긴 하지만 매우 한미(寒微)하여 정병(正兵)이었을 정도로 집안이 궁핍하였다. 경빈박씨는 1505년(연산군 11) ‘채홍(採紅)’으로 뽑혀 입궐하게 되었다. 연산군은 전국의 미녀들을 ‘채홍’한다고 하여 채홍사(採紅使)를 통해 뽑아 오도록 하였고, 경빈박씨도 출중한 미모로 인해 이때 선발되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났고, 그녀의 미모가 반정의 제일공신 박원종(朴元宗)에게 알려져서 후궁으로 추천되어 내명부 종2품 숙의(淑儀)의 품계를 받았다. 중종은 반정 직후 공신들에 의해 부인 신씨( 단경왕후)를 폐위하였고, 1507년(중종 2) 간택한 숙의 중 파평윤씨 윤여필(尹汝弼)의 딸을 왕비로 책봉하였다. 이분이 장경왕후(章敬王后)이다. 경빈박씨는 1509년(중종 4) 중종의 첫 자녀로 복성군을 출산하였고, 이후 혜순옹주(惠順翁主)와 혜정옹주(惠靜翁主)를 낳았다.
1515년(중종 10) 장경왕후가 원자(후의 인종)를 출산하고 산후병으로 7일 만에 승하하였다. 경빈박씨는 중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고, 복성군이 원자보다 여섯 살 연상이었다. 그때까지 계비(繼妃)는 후궁에서 뽑아 승차하는 방법으로 정하였고, 장경왕후 또한 그렇게 왕비가 되었기 때문에 경빈박씨는 내심 자신이 왕비가 될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정광필(鄭光弼)을 위시한 신하들이 계비를 간택할 것을 청하였고, 결국 1517년(중종 12) 파평윤씨 윤지임(尹之任)의 딸이 왕비로 간택되어 가례를 치렀다. 이분이 문정왕후(文定王后)이다. 계비의 간택으로 경빈박씨는 왕비가, 복성군은 세자가 될 수 있었던 기대가 사라지게 되었고, 이후 ‘작서의 변’이 발생하였다.
‘작서의 변(灼鼠之變)’은 1527년(중종 22) 세자의 생일에 사지를 찢어 불에 태운 쥐〔灼鼠〕를 동궁 침실 창문 밖에 매달았던 사건이다. 해생(亥生)이었던 세자에게 돼지 모양과 비슷한 쥐를 매달아 놓은 것은 세자에 대한 저주(咀呪)로 여겨졌다. 이 사건으로 경빈박씨는 폐서인(廢庶人)이 되고 복성군은 군호가 박탈되어 고향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1533년(중종 28) 소위 ‘목패(木牌)의 변’ 혹은 ‘가작인두(假作人頭)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동궁의 빈청에서 세자와 왕비 등을 저주하는 글이 새겨진 사람의 머리 형상을 한 나무 인형이 발견된 것이었다. 이 사건은 혜정옹주의 남편 홍여(洪礪)가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고, 경빈박씨와 복성군이 주모자로 지목되어 경빈박씨는 사사되었고, 복성군은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경빈박씨의 묘소는 사사된 상주에 가매장되어 있었다가 1571년(선조 4) 개장(改葬)되었다. 이는 복성군의 후사(後嗣)로 정해진 하성군(河城君)이 선조(宣祖)로 즉위하면서 경빈박씨의 묘소를 돌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