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전기 병조참지, 강원도관찰사,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무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그 뒤 연산군의 특명으로 동부승지 · 우부승지 · 우승지 · 좌승지를 역임하면서, 재정의 긴축 문제 등 시무책(時務策)을 건의해 실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1500년(연산군 6)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좌천되었다가, 곧 동지중추부사 · 한성부우윤을 역임하고, 1502년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다.
이어 강원도관찰사 · 동지의금부사를 역임하고 1506년 경기관찰사로 나갔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삭직되었다. 마침내 1506년 성희안(成希顔) · 유순정(柳順汀) 등과 함께 반정(反正)을 모의해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을 옹립하였다. 그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으로 우의정이 되고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으로 진봉(進奉)되었다.
좌의정을 거쳐 1507년 이과(李顆)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공신(定難功臣) 1등이 되고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리고 대간들의 탄핵이 지나치다라고 건의해 이를 견제했으며, 이우증(李友曾) · 조윤손(曺潤孫) · 이순(李珣) 등을 천거해 임용시키기도 하였다.
1509년 왜적이 제주도 공마선(貢馬船)을 약탈하자, 이를 문책하기 위해 대마도(對馬島)에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하자고 건의하였다. 또한 전라도 조운(漕運)선 40여 척이 파선, 침몰하자 해운을 폐기하고 육지 운송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영의정에 올랐고 이듬해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무신 출신이었지만 문장을 즐겼고 서화를 좋아해 수집에 힘썼다.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이락정집(二樂亭集)』
- 『해동명신전(海東名臣傳)』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해동잡록(海東雜錄)』
- 『대동기문(大東奇聞)』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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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음. 또는 그 벼슬.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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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양반 가운데 ‘문반’을 달리 이르던 말. 궁중의 조회 때 문관은 동쪽에, 무관은 서쪽에 벌여 선 데서 나온 말이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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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당시 해결해야할 긴급한 정책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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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
: 죄를 지은 자의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벼슬아치의 명부에서 그 이름을 지우던 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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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
: 1368년에 주원장이 강남(江南)에서 일어나 원(元)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세운 중국의 통일 왕조. 영락제 때 난징(南京)에서 베이징으로 도읍을 옮기고 몽고와 남해에 원정하여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뒤에 북로남왜에 시달리고 환관의 전횡과 당쟁, 농민의 반란이 끊이지 않아 1644년에 이자성(李自成)에게 망하였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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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
: 공신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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