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학청(講學廳)은 원자나 원손의 조기 교육을 위해 설치한 임시 관서이다. 원자와 원손을 잘 보필하고 교육함으로써 훗날의 정국 안정을 꾀하고자 설치되었는데, 간혹 권력관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는 방편이 되기도 했다. 강학관으로는 학문이 뛰어난 고위 관료들이 임명되었으며, 나이 어린 원자와 원손이 기초적인 한자를 익히고 덕성을 함양하는 선에서 교육이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세자에 책봉되기 이전의 어린 원자(元子)나 원손(元孫)을 보양(保養)하고 교육하기 위해 강학청(講學廳)을 설치하였다. 대체로 3세 이전에는 양육을 위한 보양청(輔養廳)을 두었다가 원자 · 원손이 글을 읽기 시작할 무렵에 강학청을 두어 유교 경전, 역사서 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훗날 세자에 책봉되면 시강원(侍講院), 세손에 책봉되면 강서원(講書院)에서 교육하였다.
조선 건국 초에는 원자의 교육 기관이 독립적으로 설치되지 않았고, 원자부(元子府)를 두어 강학(講學)과 시위(侍衛) 등을 포함하는 제반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원자가 세자에 책봉되었을 때 원자부가 그대로 세자부(世子府)로 활용되기도 했다. 1402년(태종 2)에 원자 제(禔)를 위해 경승부(敬承府)를 설치했는데, 1404년(태종 4)에는 원자가 세자(世子)에 책봉되면서 그 명칭 그대로 세자부로 기능하였다.
원자 교육과 관련해서 보양관(輔養官), 강학관(講學官)을 둔 사례들도 확인된다. 1518년(중종 13)에 재상들에게 원자 보양관(元子輔養官)을 겸임시켜서 원자를 보필하고 교육하였고, 1605년(선조 38)에는 8살의 원손을 교육하고자 송석경(宋錫慶) · 이극신(李克信)이 강학관에 임명되었다. 1624년(인조 2)에는 공조참의 김장생(金長生)에게 원자의 강학관을 겸하도록 하였다.
원자의 강학을 위해 강학청이라는 이름으로 관서가 운영된 시기는 분명치 않은데, 『인조실록』에서 처음으로 관서 명칭이 확인된다. 하지만 그 후 강학청이 운영된 사례가 많지는 않았던 듯하다. 강학청에서 교육한 내용과 원자와의 문답이 『강학청일기(講學廳日記)』에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숙종, 순조, 완화군(完和君 : 고종의 서장자)의 『강학청일기』가 전해지는 정도이다.
현종 때 5세의 원자(훗날의 숙종)를 위해 강학청이 설치되었던 사례를 주목해 볼 수 있다. 1665년(현종 6)에 원자 보양관의 아문(衙門)을 재정비하여 강학청을 운영하도록 하였고, 원자와 보양관의 상견례와 보양관에게 지급되는 요포(料布) 등과 관련된 절목(節目)도 마련하였다.
강학관에 임명되는 관료는 원자의 경우에는 정1품∼종2품 3인, 원손의 경우에는 종2품∼정3품 당상관 3인이었다. 특별히 학문에 뛰어난 사람을 강학관에 임명하기도 했다. 그 밖에 서책 담당 서리(書吏) 4인, 서사(書寫) 1인, 사령 4인, 수공(水工) 1인을 시강원의 예에 따라 임명하였다.
강학청에서는 기초적인 한자 교육이 주가 되었는데, 글자를 하나하나 짚어 가면서 강(講)을 하였다. 교재로는 『천자문(千字文)』, 『효경대의(孝經大義)』, 『동몽선습(童蒙先習)』, 『소학(小學)』, 『십구사략(十九史略)』 등을 활용했다. 강학은 이틀에 한 번 정도 행하되 주요 행사가 있거나 원자가 아픈 경우는 강학을 쉬기도 했다. 대체로 사시(巳時) 정각(오전 10시)에 1명의 관원이 입시하여 강학하였으며, 새로운 내용을 배우기 전에 지난 시간에 배운 부분을 뒤돌아 암기하는 배송(背誦)부터 하였다. 그런 다음에 강학관이 당일 진도에 해당하는 문구를 소리 내어 읽어 주면 원자가 반복하여 따라 읽었고, 마지막으로 그날 배운 내용을 배송한 뒤에 마무리하였다. 하루 학습 진도는 어린 원자를 배려하여 15자에서 30자 정도의 한 문장을 강학하는 수준이었다.
조선의 국왕은 백성의 모범이 되어야 했으므로, 향후 왕위를 계승하게 될 원자 · 원손의 교육은 매우 중요했다. 다만 강학청은 조선 후기에 설치되기 시작하였고, 상설 기구가 아니라 원자 책봉 이후 보양과 교육을 위한 임시 기구로서 기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