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흔히 ‘석봉천자문’이라 부른다. 경기도 개성 출신의 석봉(石峯) 한호는 승문원(承文院)에 외교문서를 필사하는 사자관(寫字官)으로 입신하여 단정한 짜임과 정갈한 점획으로 필명을 떨쳤던 인물이다.
『천자문』 앞표지에 “천자문(千字文) 내사(內賜)”라 쓰여 있는데 후대에 개장(改粧)하여 쓴 것으로 여겨진다. 안쪽은 오랜 사용으로 인해 종이가 낡아져 책장을 넘기는 귀퉁이를 종이로 덧대었다. 표지 이면에는 “萬曆十一年七月 日(만력십일년칠월일) 內賜司諫院大司諫朴承任千字文一件(내사사간원대사간박승임천자문일건) 命除謝(명제사) 恩(은) 左副承旨臣(좌부승지신) (수결)”이란 내사 기록이 있고, 첫 면 위쪽에 세로 8㎝, 가로 8.1㎝의 ‘선사지기(宣賜之記)’가 찍혀 있다. 모두 42장으로 각 장 6줄 24자씩 배열했는데, 첫 줄에 ‘천자문’이라 새기고 마지막 줄에 “萬曆十一年正月(만력십일년정월) 日副司果臣韓濩奉(일부사과신한호봉) 敎書(교서)”를 작은 글자로 새겼다. 이로 보아 1583년 정월에 오위(五衛) 소속의 부사과이던 한호가 왕명에 따라 써서 간행되었으며, 그해 7월에 영주 출신의 대사간 박승임에게 내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찍이 이 초간본과 같은 판본이 일본 도쿄 국립공문서관(國立公文書館)의 내각문고(內閣文庫)에 소장되어 있어 국어학 분야에서 연구되었다. 특히 초간본과 후대 중간본의 천자문 음훈(音訓)을 대조하여 중세 국어의 변화과정을 밝혔고, 또 초간 이전과 이후의 다른 천자문 간본과 비교하여 석봉천자문이 조선 후기 천자문 계통의 중심이 되었음을 밝혔다.
초간 이후 석봉천자문은 임진왜란을 막 지난 1601년(선조 16) 칠월에 왕실교육용으로 내부(內府)에서 개간되었고, 1690년에는 숙종의 「어제천자문서(御製千字文序)」를 앞쪽에 더해 중간되었다. 이후에도 몇 차례 새겨져 갑술중간본(甲戌重刊本), 경인중보본(庚寅重補本) 등이 전한다. 이에 따라 이 『천자문』은 조선시대 천자문 판본 가운데 가장 널리 전파되면서 초학자의 한자와 글씨 학습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점에서 국내 유일의 이 초간본은 국어학·서지학·교육사·서예사 분야의 연구 자료로서 가치가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