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송준길의 장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후손댁에 전래되어 왔다. 표지에 ‘동춘당필적’이라 쓰여 있고 글씨는 모두 28면이다. 앞쪽 8면에 남송 유학자 주희(朱熹)의 「학고재명(學古齋銘)」을 단정한 행서로 썼고, 나머지 면에 정경세의 「우곡잡영20절(愚谷雜詠二十絶)」을 행초로 썼다. 이 칠언절구 20수는 정경세가 44세 때인 1606년 삼월 하순에 자신의 복거처인 경상북도 상주의 우곡(愚谷) 10여 리의 승경을 읊은 것으로 『우복집(愚伏集)』에 수록되어 있다.
송준길은 예학에 밝았고 문장과 글씨에 능했는데, 특히 같은 은진송씨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당대의 많은 비갈문(碑碣文)을 짓고 썼다. 그는 이이(李珥) 이후 김장생·김집 등 기호학파의 학맥을 계승하면서 초년에는 율곡계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글씨를 익혔고, 뒤에는 영남학파 학자였던 장인 정경세를 통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문뿐 아니라 글씨까지 수용하였다. 이 서첩이 바로 그러한 면모를 보여주는 예로서 이황 글씨를 가미한 송준길의 전형적인 서풍이 잘 나타나 있다. 필사한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그가 1669년에 쓴 「민기신도비명(閔機神道碑銘)」, 「서증손병하(書贈孫炳夏)」와 유사하여 노년의 필적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