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순거 초서 무이구곡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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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순거 초서 무이구곡가
윤순거 초서 무이구곡가
서예
작품
국가유산
학자이자 초서 명필인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가 17세기 후반에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대자 초서로 쓴 필적.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윤순거 초서 무이구곡가(尹舜擧 草書 武夷九曲歌)
분류
기록유산/서간류/서예/서예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보물(2010년 10월 25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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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학자이자 초서 명필인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가 17세기 후반에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대자 초서로 쓴 필적.
내용

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0폭 병풍으로 장황되었고 마지막 폭 말미에 세로 4.35㎝, 가로 4.45㎝의 “윤순거노직장(尹舜擧魯直章)”이란 인장이 찍혀 있다. 17세기 필적 가운데 종이 바탕이 큰 편이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흔히 「무이도가(武夷棹歌)」라고도 하는 「무이구곡가」는 남송시대 유학자 주희(朱熹)가 복건성(福建省) 무이산 아래에 머물면서 그곳의 승경(勝景)을 찬미하며 지은 칠언절구 10수이다. 서시(序詩)에 이어 1곡에서 9곡까지 각각의 빼어난 경치를 읊었는데, 흔히 주희 자신이 처음 학문에 입문하여 이를 성취해가는 심경을 나타낸 것이라고도 한다. 이런 점에서 조선시대 선비들은 이 시를 읊으며 주희를 흠모하였고, 또 이를 본 따서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산천을 구곡으로 명명하며 시로 읊어내곤 하였다.

윤순거의 글씨에 대해 그의 조카 명재(明齋) 윤증(尹拯)이 지은 신도비명을 보면, 처음에 외증조부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의 글씨를 배웠고 이것이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로 옮겨가 한 획도 함부로 지나가지 않고 반드시 고법(古法)으로 썼다고 한다. 또 초서에서는 당나라 회소(懷素)의 필법을 취했는데 그 운필이 마치 귀신의 조화와 같아서 쫒아갈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의 경지를 터득했다고 한다. 이 병풍 필적이 바로 그러한 예로서 동세와 속도감이 풍부하고 필세가 힘차며 방일(放逸)하다. 특히 파필(破筆)이 곳곳에 드러나 있는데, 이는 일반적인 털붓[毛筆]이 아니라 대나무를 잘게 가른 죽필(竹筆) 등을 사용했기 때문인 듯하다. 너그러운 짜임과 쾌속한 운필에서 16세기의 초서 명필인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의 초서와 연계되는 듯하며, 또 장봉(藏鋒)에 의한 원만한 운필은 당나라 회소의 광초(狂草)에도 맥이 닿는다. 이러한 윤순거의 초서풍은 17세기 대자 서풍의 새로운 면모를 이루었고, 이후 18세기 초서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참고문헌

『명재유고(明齋遺稿)』권40 「중부동토부군신도비명(仲父童土府君神道碑銘)」
『우리나라의 옛글씨』조선후기 명필(문화재청,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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