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표지에 “영묘어필(英廟御筆) 읍궁진장(泣弓珍藏)”이라 쓰여 있다. ‘읍궁’이란 중국 상고시대 황제(黃帝)가 승하하자 백성들이 그의 승천을 막았는데, 이에 황제가 쥐고 있던 활을 떨어뜨리자 백성이 그 활을 끌어안고 슬프게 울었다는 고사에서 나왔다. 모두 12점의 어필이 실려 있는데, 앞쪽에 1761년 1월 16일 약원(藥院: 내의원)에 내린 비답(批答)을 비롯하여 1761년과 1763년에 도승지에게 전한 전교(傳敎), 1765년 3월 효종의 잠저 어의궁(於義宮)에서 읊은 사언구의 인본(印本), 1770년(영조 46) 7월 11일 세손과 함께 홍문관에 납시어 관원들과 야대(夜對)한 뒤 내린 「서시옥당(書示玉堂)」, 사언시와 이틀 뒤 홍문관에 써준 「학사관(學士館)」 대자, 1771년 4월 홍문관 교리 겸 시독관 심이지(沈頤之)를 충청도 직산현에 어사로 파견할 때 써준 「직산(稷山)」 대자 등이다.
이들 어필은 영조 때 문신이던 심수(沈鏽, 1707~1776) 부자가 모은 것으로 여겨진다. 1761년 내의원에 비답을 내릴 때 심수는 도승지로 내의원 부제조를 겸했고, 1761, 1763년 전교는 도승지 심수를 통해 전해졌으며, 1771년의 직산어사 심이지는 심수의 아들이었다. 심수는 본관이 청송(靑松)으로 1727년 생원시 입격, 1745년 정시문과 합격 후 승정원 부승지·승지로 내의원 부제조·제조를 겸했고, 1760년 도승지에 특별히 제수된 뒤 1764년 5월까지 영조를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그 뒤 예조·형조·이조판서와 함경감사·한성판윤·경기감사 등을 지냈고 1776년 기로소에 들어가 그해 사망하였다.
오늘날 영조의 어제어필을 모은 서첩이 자못 전하는데, 그중에서도 『읍궁진장』 첩은 연대를 알 수 있는 필적이 많아 영조의 노년 서풍을 잘 살필 수 있다. 또한 조선 후기 고급 장황으로 꾸며졌고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그 가치가 더욱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