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어필 - 숙빈최씨사우제문 원고는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가 1726년에 쓴 원고이다. 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영조가 돌아가신 생모 숙빈 최씨의 생신을 맞아 사당에 나아가 전배례를 행하고자 쓴 것이다. 제문을 보면 영조는 경종의 국상이 끝난 1726년에서야 전배례를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마지막 구절에서는 숙빈 최씨에 대한 애절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제문 뒤쪽에는 영조가 후궁이던 정빈 이씨의 사당에 올리는 짧은 축사가 딸려 있다. 이 어필은 영조 33세에 쓴 이른 필적으로 숙빈 최씨 관련 영조의 어제어필을 대표한다.
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영조가 1726년(영조 2) 11월 6일에 선빈(先嬪) 즉 돌아가신 생모 숙빈최씨(淑嬪崔氏, 1670~1718)의 생신을 맞이하여 세자를 데리고 사당에 나아가 전배례(展拜禮)를 행하고자 짓고 쓴 제문의 원고이다.
숙빈최씨는 본관이 해주이고 서울 여경방(餘慶坊)에서 출생하였다. 일곱 살에 입궁하였고 1693년 숙원(淑媛)이 되어 첫째 영수(永壽)를 낳았으나 두 달여 만에 사망하였다. 1694년 숙의(淑儀)가 되어 둘째 금(昑: 영조)을 낳았으며 1695년 셋째를 낳았으나 사흘 만에 사망하였다. 1699년 숙빈에 봉해지고 아들 금이 연잉군(延礽君)에 책봉되었다. 1716년 병환이 들어 창의동(彰義洞) 사제(私第)에 나가 요양하다가 1718년(숙종 44) 3월 19일에 사망하였다. 양주 고령동 옹장리 묘향에 묻혔는데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소령원(昭寧園)이다.
제문을 보면 영조는 선왕 숙종과 선빈의 은혜로운 사랑으로 성장하던 중 선빈의 삼년상을 마치는 1720년 6월에 부왕마저 돌아가시자 깊은 슬픔에 빠졌고, 1721년 8월 왕세제(王世弟)로 책립됨에 따라 선빈의 영전을 떠났으며, 즉위 후 1725년 12월에 선빈의 사당을 경복궁 뒤쪽에 세웠으나 찾아가지 못하다가 경종의 국상이 끝난 1726년 11월에서야 전배례를 올리게 되었다고 적혀 있다. 그래서 제문에서 “지금은 사시(四時)의 제사 또한 아직 몸소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하였고, “아! 선빈께서 낳으신 형제가 셋이나 형은 이미 죽고 아우 또한 죽어서 선빈께서 의지하실 데란 오직 소자 밖에 없었습니다.” 하였으며, 마지막 구절에서 “아! 오늘에야 (선빈의 삼년상 이후) 육년 동안 펼치지 못한 회포를 펼치옵니다.” 하면서 그간 참아왔던 선빈에 대한 애절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제문 뒤쪽에는 영조가 후궁이던 정빈이씨(靖嬪李氏, 16941721)의 사당에 올리는 짧은 축사(祝詞)가 딸려 있다. 정빈이씨는 이후철(李後哲)의 딸로 1701년 연잉군과 혼인하여 효장세자(孝章世子, 17191728)를 낳았다. 이른 나이에 병이 심해 장동(壯洞) 사제로 나가 요양하다가 1721년 11월 26일 사망하여 숙빈최씨 묘소 앞 산자락에 묻혔다(지금의 수길원(綏吉園)). 영조는 즉위 후 그를 정빈으로 추증하고 묘비를 세웠고 숙빈최씨 사당에 가까운 경복궁 북쪽에 사당을 두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는 영조의 어제어필 원고가 다수 전하는데, 이 제문 원고는 흔히 전문(箋文)에 사용되는 절첩(折帖)에 쓰여 있다. 전문이란 나라에 길흉이 있을 때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던 사륙체 글을 말한다. 첫 면에 어떤 전문 6줄을 벗겨내고 썼는데, 평소 물자를 아꼈던 영조의 절약정신을 보여준다. 주홍색 무늬비단으로 싼 앞면에 “御筆親祭祭文草(어필친제제문초)/ 英祖御製御筆(영조어제어필), 淑嬪崔氏几筵(숙빈최씨궤연) 及 靖嬪李氏祠宇致祭文(급 정빈이씨사우치제문) 「抄本(초본)」”이란 근대 글씨가 있다. 이 중 치제문은 ‘신하를 보내 제사 지내는 글’이란 뜻이므로 잘못 쓴 것이다. 이 제문 원고는 행서로 흘려 썼고 곳곳에 문구를 고쳐 끼워 넣어 판독이 쉽지 않다. 영조 33세의 이른 필적으로 희귀할 뿐만 아니라 1744년의 「숙빈최씨소령묘갈문원고」와 함께 숙빈최씨와 관련된 영조의 어제어필을 대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