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국빈(國賓), 호는 근옹(芹翁)·근곡(芹谷). 이주(李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창정(李昌庭)이다. 아버지는 이심(李示+尋)이며, 어머니는 이민환(李民寏)의 딸이다.
1639년(인조 17)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 유생으로서 뛰어난 재질을 보여 천거로 참봉이 되고, 1653년(효종 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한 뒤 사헌부장령이 되었다.
1660년(현종 1) 효종이 죽자, 효종의 계모인 조대비(趙大妃)의 복상문제가 있을 때 당시 기년설(朞年說: 만1년)을 주장한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에 대하여 만3년설을 주장하다가 쫓겨난 남인 허목(許穆) 등을 구제하려다가 전라도도사로 좌천되었다.
1664년 다시 장령이 되고, 1672년 승지가 되었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여 남인이 집권하자, 이듬해 대사성·대사헌을 지내는 한편,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숙종의 신임을 얻었다.
1680년(숙종 6)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89년 예조판서를 거쳐, 세자와 세손을 교육하는 보양관(輔養官)에 임명되었다. 그 뒤 이조판서를 지내고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1694년에 노론인 김춘택(金春澤) 등이 숙종의 폐비 민씨의 복위운동을 일으킴으로써 노론과 소론 일파를 제거하려던 남인들이 오히려 참화를 당한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앞서 1689년에 일어났던 기사환국 때의 발계인(發啓人: 장계를 발의한 인물)으로 삭출(削黜)되었다.
해서(楷書)에 일가를 이루었고, 만년에는 김생(金生)의 필법을 연구하였다. 저서로는 『근곡집(芹谷集)』이 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