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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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개념
세상을 다스리는 도리 또는 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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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세상을 다스리는 도리 또는 방도.
내용

조선시대에는 사림정치(士林政治)에서 표방되었던 통치 원리, 즉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이단을 배척하고, 정학(正學)을 북돋우는 일 등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통치를 이룩하기 위한 권력의 행사나 행사자를 가리키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사림은 유가(儒家) 본래의 정치 철학을 좇아 군주(君主)나 일부 신료(臣僚)의 독재적 정치 운영을 부정하고, 지식인들의 광범한 참여를 통한 일종의 여론정치 내지는 현인(賢人)들의 철인정치(哲人政治)를 지향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출사(出仕 : 관직에 나아감)를 통해서, 또는 재야에서의 상소나 수령에 대한 협조·간여를 통해서 통치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의무이자 권리인 것으로 인식하였다. 또 그들의 권리와 의무를 바르게 수행하기 위한 기본적인 원리·원칙을 추구하고 확립하는 데도 노력하였다.

이른바 ‘세도’는 이러한 노력 속에서 도학(道學)의 성립과 더불어 확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광조(趙光祖)가 도학의 원리를 도치(道治)의 정치사상으로 심화시킨 데서 세도가 처음으로 주창되었고, 또 그에 의해 세도가 처음으로 행사되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조광조의 후학들이 그를 가리켜 “학문하는 방도를 지시하고 세도를 부식(扶植)했으니, 이로부터 선비들이 비로소 취생몽사(醉生夢死)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알게 되었다.”고 추앙하고 있는가 하면, “그로부터 성군(聖君)·현상(賢相)과 모든 선비들이 세도의 책임을 맡고 나섰으니……”라고 회고하고 있는 것이 그 한가지 예가 되겠다.

조광조 이후 세도는 사림정치에서 최고의 권위를 지니는 통치 원리로 군림해갔다. 그리하여 그 어떤 통치자나 집권 형태도 모두 이를 가지고 스스로의 통치를 조정하게 되었고, 또 그 정당성을 가늠하게도 되었다.

당초부터 사회 교화의 원리로서도 설명될 소지를 지닌 세도였지만, 그것이 교화의 원리로까지 정착되어진 것은 이러한 사림정치의 전개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겠다.

한편, 세도는 무엇보다도 공정한 언론과 인재 등용, 그리고 이에 대한 군주의 신임 내지는 위탁 등이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운영 기반이었다. 때문에, 사림간의 시비·분열을 불가피하게 하여 이른바 사화·당쟁을 낳게도 했고, 또 나아가서는 군주의 위탁을 빙자한 변태적인 세도, 즉 세도정치를 출현하게도 하였다. →세도정치

참고문헌

『청종사차(請從祀箚)』(이준경, 정암선생문집)
『조정암행장(趙靜庵行狀)』(이황)
『송우암묘표(宋尤庵墓表)』(권상하, 송자대전)
『조선유학연원(朝鮮儒敎淵源)』(장지연, 1922)
『조선기독교급외교사』(이능화, 조선기독교창문사, 1928)
「근세세도정치의 역사적 고찰」(이선근, 『국사상의 제문제』 5, 1959)
집필자
한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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