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책 80장. 활자본.
책의 크기는 가로 23㎝, 세로 36㎝이다. 사목은 절목(節目)이라고도 불린다. 재거 사목은 봉명사신(奉命使臣 : 왕의 특명으로 지방에 파견되는 사신)이 휴대해야 할 직무 수행 사항이 적혀 있는 문서를 말한다.
봉명사신의 사목의 예를 들어보면, 1413년(태종 13) 8월 무오(戊午)의 <분견경차관사목 分遣敬差官事目>, 1462년(세조 8) 4월 임오일(任午日)의 분순어사(分巡御史, 分臺御史로도 표현함.)의 재거사목, 1468년 4월 계축일(癸丑日)의 분견행대(分遣行臺)의 사목, 1453년(단종 1) 정월 정축일(丁丑日)의 문민질고별감(問民疾告別監)의 재거사목, 1489년(성종 20) 11월 병자일(丙子日)의 전한 성세명(成世明), 응교 민사건(閔師騫) 등 8인을 각 도에 분견하면서 내린 재거사목 등의 예가 보인다.
중종 이후 역대 왕이 암행어사를 많이 파견하고 있으나 사목이나 절목을 지급한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암행어사 사목의 예가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승정원일기≫ 1681년(숙종 7) 정월 12일조에 “단금번수의지행(但今番繡衣之行)은 특별염문(特別廉問)의 조건만이 아니고, 또 염찰할 일이 있으니 삼공(三公)에게 물어 강정절목(講定節目)을 만들어 즉시 입계(入啓)하라.”라고 기술하고 있다.
≪증보문헌비고 增補文獻備考≫ 직관(職官) 어사항(御史項)의 숙종 7년조에 ‘암행어사비국예수절목외가정절목 暗行御史備局例授節目外加定節目’이라고 하고, 가정절목 15개 조목을 게재하고 있다.
위 두 인용문을 종합해 보면, 암행어사에게는 특별염문의 예수절목(封書로 발전) 외에 일반염찰 사항인 가정절목을 비국에서 만들어 지급하는 예가 숙종대부터 생긴 것으로 보인다.
≪비변사등록 備邊司謄錄≫의 영조 11년(1735) 정월 18일조를 보면 ‘어사염문조건(御史廉問條件)’ 19개 조목을 제시하고 있다. 이 조건 중에는 추생외(抽栍外 : 암행어사가 파견되는 특정 군현이외 지역)의 소문(所聞) 사항, 서북수령·변장(西北守令邊將) 사항, 제궁가(諸宮家) 사항, 각영문(各營門) 사항, 호남감·수영(湖南監水營) 사항, 평안도 관계 사항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어사염문조건은 추생군현(抽栍郡縣)만을 상대로 한 염문규찰 조건뿐만 아니라 팔도암행어사 전원에게 필요한 종합적인 실찰 내지 직무수행 사항을 준비한 사목임을 알 수 있다.
암행어사에게는 추생군현에 관한 특별 임무의 수행 사항이 기입되는 ‘봉서(封書)’와 각 도 공통의 염찰 사항과 각 도 특유의 고질적인 폐정사항(弊政事項) 등을 모두 기입한 ‘사목’(절목)의 두 가지가 지급되는 예가 숙종대부터 시작된 듯하다. 이 사목을 ‘어사염문조건’이라고도 하였으며, 비변사에서 만들었다.
영조·정조대를 거쳐, 대를 거듭하면서 더욱 증보되고 더욱 비대해져서 과거의 ‘어사염문조건’이 책자로 간행하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정조실록≫에 의하면 비변사에서 암행어사에게 지급하기 위한 ≪제도어사재거사목 諸道御史齎去事目≫을 마련, 이를 편찬해 왕에게 올리고 있다. 여기에는 전국 팔도의 염찰 사항이 도별로 빠짐없이 모아저 있다.
그 뒤 정조는 비국으로 하여금 염찰 사항을 더 증보하게 하고 한문체로 된 ≪제도어사재거사목≫을 이두체(吏讀體)로 바꾸고 ≪팔도어사재거사목 八道御史齎去事目≫으로 이름을 바꾸어 간행, 반포하였다.
≪팔도어사재거사목≫은 전국 각 도별의 폐정 사항을 모아서 엮은 책자로서 폐정 사항의 집대성이다. 암행어사에게 지급해 추생군현 뿐만 아니라 도내 사정도 전부 조사시켜 별단(別單)으로 폐정 상황과 대책을 작성해 제출하도록 한 것이다.
목적은 각 도 어사의 별단을 모아서 전국적으로 폐정 상황을 파악하고 행정적 대책을 강구하는 데 있다. ≪팔도어사재거사목≫의 제작 연대를 보면 1793년(정조 17) 2월 을유일(乙酉日)에 포상을 잘못한 암행어사는 파직할 것이라는 교서를 내리고, 취지를 수의사목(繡衣事目)에 게재할 것을 명하고 있다.
어사처벌규정은 ≪제도어사재거사목≫에는 없고 ≪팔도어사재거사목≫에 게재되고 있다. 이로 보아, 사목은 1793년 2월 이후에 편찬된 것이 분명하다.
한편 ≪비변사등록≫ 정조 17년 5월 27일조의 수의(繡衣)에 관한 기사에 ‘비국인본사목(備局印本事目)’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인본사목은 ≪팔도어사재거사목≫ 외에는 없기 때문에 1793년 3월에서 5월 사이에 인반된 것으로 여겨진다. 규장각·장서각도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