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승지(都承旨)·좌승지(左承旨)·우승지(右承旨)·좌부승지(左副承旨)·우부승지(右副承旨)·동부승지(同副承旨) 등 6승지를 말하며,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였다. 본래 승지는 고려시대에 승선(承宣) · 대언(代言) 등으로 일컬어졌다. 중추원 · 추밀원(樞密院) · 중대성(中臺省) · 밀직사 · 광정원(光政院) 등 여러 관서의 속아문(屬衙門)인 승선방(承宣房) · 승지방 · 대언방(代言房) 등에 속하였으며, 정원은 5인이었다. 예를 들면 승선방은 지주사(知奏事) · 좌승선 · 우승선 · 좌부승선 · 우부승선 각 1인으로 5승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조 신반관제(新頒官制)에서도 중추원의 속아문인 승지방에 도승지 · 좌승지 · 우승지 · 좌부승지 · 우부승지 등 5승지제를 유지하였다. 1400년(정종 2) 4월의 관제 개혁 때 중추원이 삼군부(三軍府)로 개편되면서 승정원으로 독립아문이 되었을 적에도 5승지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5승지제가 6승지제로 기구가 커진 것은 1405년(태종 5) 1월 동부대언(同副代言) 1인을 증치하면서부터이다. 당시 대언방에는 대언 5인이 있어서 이 · 병 · 호 · 예 · 공조의 일을 자문하였다. 형조에는 지부(知部)가 따로 있어 도관(都官)에서 노비 소송을 처결하던 것을, 대언 1인을 늘려 형조의 일을 자문하게 하고 도관의 노비 소송은 형조우참의(刑曹右參議)에게 관장시켰다. 이로써 6대언제의 성립을 보게 되었고, 대언방은 다시 승정원으로 독립되었다. 대언은 1433년(세종 15) 9월 다시 승지로 개칭되어 6승지제가 제도적으로 완성되었다.
승지의 6조 분장은 처음부터 이 · 호 · 예 · 병 · 형 · 공조의 순서대로 도승지가 이조, 좌승지가 호조, 우승지가 예조, 좌부승지가 병조, 우부승지가 형조, 동부승지가 공조의 일을 나누어 맡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동부승지를 신설할 때 형조의 일을 맡아본 것으로도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 초기의 실록을 보면, 도승지는 6승지의 장으로서 이조뿐 아니라 병조 · 형조 등 다른 조의 일을 맡아본 기록이 있고, 동부승지도 형조뿐 아니라 호조 등 여러 조의 일을 자문하였다.
실록에 명확한 지적이 없지만, 그러나 『동국문헌비고』에 보면, 1466년(세조 12) 1월의 관제개혁 때 『경국대전』의 6조 순서대로 분장이 고정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승지는 왕의 근시로서 왕명 출납을 맡고 있었던 중요한 관서였기 때문에 담당 조처(曹處)의 자문 이외에 겸무가 많았다. 즉,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 6승지), 겸춘추(兼春秋, 6승지), 예문관 직제학(도승지), 상서원정(尙瑞院正, 도승지), 지제교(知製敎)(6승지), 사옹원(司饔院) · 내의원(內醫院) · 상의원(尙衣院) · 전옥서(典獄署)의 부제조(副提調, 승지 1인) 등 막중한 많은 임무를 겸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