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부승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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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밀직사와 조선시대 중추원 · 승정원 · 승추부(承樞府)의 정3품 당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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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 후기, 밀직사와 조선시대 중추원 · 승정원 · 승추부(承樞府)의 정3품 당상관.
내용

정원은 1인이다. 1276년(충렬왕 2) 원나라 간섭으로 고려 관제를 격하, 축소하는 조처에 따라 현종 이래의 중추원을 밀직사로 개편할 때, 우부승선(右副承宣)을 우부승지로 개칭하면서 성립되었다.

이후 충선왕의 자주적 정책 및 충선왕의 폐위로 인한 구제도로의 환원 등과 관련, 1298년 5월 밀직사광정원(光政院)으로 개편될 때 좌부승지와 함께 종6품의 부승지로 격하, 개칭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광정원이 다시 밀직사로 복구되면서 부승지가 정3품의 좌부승지 · 우부승지로 환원되어 복구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는 좌부승지와 함께 부대언(副代言)이 되면서 소멸되었다. 우부승지는 여타의 4승지와 함께 국왕의 측근에서 왕명을 출납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392년(태조 1) 고려 말의 중추원을 계승해 중추원을 설치하고, 그 속관으로 영중추원사 이하를 두면서 성립하였다.

이후 왕권 강화로 인한 승정원의 독립이나 중추원의 개편과 관련해 1400년( 정종 2) 승정원이 새로이 설치되고 중추원의 왕명 출납 기능이 승정원으로 귀속되면서 승정원에 이속되었다.

1401년( 태종 1) 중추원이 승추부로 개편되고 승정원이 다시 승추부에 합병되면서 승추부우부승지로 개칭되었다. 1405년 다시 승정원이 독립될 때 승정원에 이속되기는 했으나 우부대언으로 개칭되었다.

이어 1433년( 세종 15) 지신사(知申事)도승지(都承旨)로 개칭하는 조처에 따라 우부승지로 개칭되면서 정립되고, 이것이 ≪ 경국대전≫에 명문화되면서 조선 말기까지 계승되었다. 1894년( 고종 31) 갑오경장에 수반된 관제개혁 때 궁내부(宮內府) 승선원칙임관(勅任官)우부승선으로 개칭되면서 소멸하였다.

우부승지는 여타의 5승지와 함께 국왕의 측근에서 왕명을 출납하고 육조의 업무를 분장하였다. 또한 기능이 왕권과 직결되었던 만큼 왕권이 강력한 시기나 국왕의 신임을 받을 때는 의정부 · 육조 대신에 필적하는 기능을 발휘하였다.

시종 기능으로는 춘추관수찬관 · 경연참찬관 · 첨사원첨사(詹事院詹事) 및 예빈시와 경복궁의 부제조(副提調) 등을 겸임하면서 담당 업무와 각 사(司)의 업무를 지휘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대조실록(大祖實錄)』
『정종실록(定宗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고종실록(高宗實錄)』
『대전회통(大典會通)』
「고려의 중추원(中樞院) 연구」(박용운, 『한국사연구』 12, 1976)
「고려의 중추원(中樞院)」(변태섭, 『진단학보』 41, 1976)
「조선초기승정원연구」(한충희, 『한국사연구』 59,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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