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에 따라 생산되는 과일이나 농산물을 신주를 모신 사당이나 제단에 올려 먼저 차례를 지내거나 지방 특산물을 왕에게 올리는 것을 관장하여 온 사옹방(司饔房)이 1467년(세조 13)에 사옹원으로 개편되어 비로소 녹관(祿官)을 두게 되었다.
사옹원의 ‘옹(饔)’은 ‘음식물을 잘 익힌다.’는 뜻으로 문소전(文昭殿)의 천신(薦新)도 관장하였다. 조선 전기 『경국대전』에 나타난 소속관원을 보면 실무직으로는 정(正) 1인, 첨정(僉正) 1인, 판관(判官) 1인, 주부(主簿) 1인, 직장(直長) 2인, 봉사 3인, 참봉 2인 등이고, 자문직으로는 도제조(都提調) 1인, 제조 4인, 부제조 5인인데 1인은 승지가 겸임, 제거(提擧)·제검(提檢)을 합쳐 4인을 두었다.
그리고 잡직으로는 재부(宰夫) 1인, 선부(膳夫) 1인, 조부(調夫) 2인, 임부(飪夫) 2인, 팽부(烹夫) 7인을 두었다. 이러한 제도가 조선 후기까지 별 변동없이 내려왔는데 『속대전』에 이르러 판관 1인을 감하고, 주부 1인을 증치하여 2인이 되었으며, 참봉을 없앴다.
또한 정은 가례(嘉禮) 때에 차출하고 제거·제검도 객사(客使)에게 잔치를 베풀 때에 차출하게 하였다. 그 뒤 『대전회통』에 이르면 주부 1인이 증치되어 3인으로 정해지면서 이 인원은 조선 말기 사옹원이 폐지될 때까지 그대로 지켜졌다. 또한 잡직도 『경국대전』의 정원이 그대로 지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