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속 관원은 종3품인 사(使)가 2인, 종4품의 부사(副使) 2인, 종6품의 판관(判官) 2인이 배속되고 있었는데 모두 겸직이었다. 정확한 설치시기는 알 수 없으나 1298년에(충렬왕 24)에 폐지되었다는 설명에서 그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승지방이 1298년 충선왕의 수선(受禪)과 함께 혁파되었다가 곧 다시 복구되고, 1308년에 다시 인신사(印信司)로 개칭된 데에는 왕 부자간의 대립과 충선왕의 개혁정치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1298년에 충선왕은 승지방을 혁파하고 사림원(詞林院)을 설치하여 여기에 새로운 인물들을 소속시켰다. 사림원은 그 전신이 문한서(文翰署)로서 같은 해 충선왕이 정방(政房)을 혁파하고, 이 문한서로 하여금 선법(選法)을 주관하게 하였다가 이어 이름을 사림원으로 고치면서, 왕명출납의 소임도 여기서 맡도록 하였다.
따라서 승지방은 상서사(尙瑞司)·인부랑(印符郎)과 함께 충선왕이 개혁정치를 전개해나가는 과정에서 혁파되기도 하고 복구되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관부는 명칭상으로는 조선왕조에 전승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 기능면에서는 충선왕대를 고비로 소멸되었다.
나아가서 1308년 인신사로 개칭되었다는 사실은 그 소임도 인신관계의 업무로 바뀌었음을 뜻하며, 이는 바로 상서사의 종속적인 기구로 변화해갔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