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부처녀추고별감 ()

목차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시대 원나라의 요청에 따라 공녀를 선발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임시관서.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고려시대 원나라의 요청에 따라 공녀를 선발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임시관서.
내용

그 유래는 1274년(원종 15) 원나라에 귀부(歸附)한 송나라 병사인 만자군(蠻子軍)에게 고려인 처(妻)를 마련해 주기 위하여 설치된 결혼도감(結婚都監)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고려조정에서는 원나라에서 요구하는 140명의 인원을 충당하기 위하여 민간의 독신녀, 파계승의 딸, 역적의 아내 등을 수색하여 그 수를 채워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1276년(충렬왕 2) 귀부군행빙별감(歸附軍行聘別監)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그 인원의 많고 적음이나 외국인에게 출가한다는 사실 자체보다도 그것이 주는 사회적 영향이나 정신적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고, 국민들의 원성 또한 매우 컸다. 뒤에는 공녀나 환자(宦者)를 보내야 하였던 사실과 더불어 당시 고려가 겪어야 하였던 뼈아픈 시련을 대변하는 것이라 하겠다. → 결혼도감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특수관부연구(高麗特殊官府硏究)」(문형만, 『부산사학(釜山史學)』 9, 1985)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