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병조참판, 형조판서, 삼남도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594년 병조좌랑에 재직 중 명나라 유격장(遊擊將) 진운홍(陳雲鴻)을 따라 적장 고니시[小西行長]의 군영을 방문해 정탐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듬 해 병조정랑으로 승진해 순무어사(巡撫御史)를 겸임하였다. 1596년 이몽학(李夢鶴)이 홍산(鴻山)에서 일으킨 반란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난이 평정된 뒤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승진하였다.
그 해 겨울 찬획사(贊劃使)로 임명되어 충주의 덕주산성(德周山城)을 쌓고, 또 조령에 방책(防柵)을 설치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분조(分朝)의 호조참의가 되어 명나라 원병의 군량미 보급을 관장하였다.
1602년 경상도관찰사로 임명되어 4년간 선정을 베풀다가 1604년 형조참판을 지냈다. 이듬 해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포루(砲樓)와 성곽을 수축하고 그 해 가을에 예조와 병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했다가 양사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였다. 1619년(광해군 11) 광해군의 특명으로 오도참획사로 임명되어 다음 해 평안도에 가서 민폐를 크게 고치고 둔전(屯田)을 설치해 군량을 충족하게 하였다.
이 때 고향의 친척인 옥강만호(玉江萬戶) 변일(邊溢)이 청병(淸兵)의 침입을 막지 않고 성을 버리고 도망해 사형당한 사건이 있었다. 이 때문에 광해군이 크게 노해 이시발에게 책임을 묻자 신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한성부판윤을 거쳐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이듬 해 이괄(李适)의 난 때 체찰부사(體察副使)로 난의 수습에 공을 세웠다. 그 뒤 삼남도검찰사(三南道檢察使)가 되어 남한산성의 역사(役事)를 감독하였다.
저서로 『주변록(籌邊錄)』 · 『벽오유교』가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조방목(國朝榜目)』
- 『송자대전(宋子大全)』
- 『벽오유고(碧梧遺稿)』
-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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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조선 시대에,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던 임시 과거 시험. 태종 1년(1401)에 처음 실시하였으며 생진과의 초시와 복시, 문과의 초시ㆍ복시ㆍ전시 5단계로 나누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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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1368년에 주원장이 강남(江南)에서 일어나 원(元)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세운 중국의 통일 왕조. 영락제 때 난징(南京)에서 베이징으로 도읍을 옮기고 몽고와 남해에 원정하여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뒤에 북로남왜에 시달리고 환관의 전횡과 당쟁, 농민의 반란이 끊이지 않아 1644년에 이자성(李自成)에게 망하였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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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지금의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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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
: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세운 울타리.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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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
: 임진왜란 당시 세자가 있던 임시 조정을 부른 이름. 선조가 있던 의주 행재소를 원조정이라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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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
: 포를 설치하여 쏠 수 있도록 견고하게 만든 시설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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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7
: 인목대비 폐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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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8
: 토목이나 건축 따위의 공사.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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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9
: 나라에 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 주는 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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