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옷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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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적의 화살이나 창검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입었던 쇠나 가죽의 비늘을 붙여서 만든 옷.
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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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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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쟁에서 적의 화살이나 창검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입었던 쇠나 가죽의 비늘을 붙여서 만든 옷.
개설

갑(甲)은 갑옷, 주(胄)는 투구를 이른다. 갑옷은 전쟁에서 화살·창검을 막기 위해 쇠나 가죽의 비늘을 붙여서 만든 옷이며, 투구는 적의 무기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머리에 썼던 모자이다. 갑주는 전투시에 전사들이 몸을 지키기 위하여 착용하던 무구(武具)로서, 처음에는 단순한 보호용으로만 이용되었기 때문에 짐승의 가죽 등을 이용하였지만, 그 뒤 사용의 범위가 확대됨에 따라 재료가 다양해졌다.

연원 및 변천

우리나라의 갑옷은 청동기시대부터 가죽제 단갑과 뼈, 나뭇조각으로 만든 찰갑이 처음 등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유기질 갑옷은 오래 보존되지 못하므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청동기시대의 갑옷 유물은 없다. 한반도에서의 갑옷의 사용은 가야 지역의 철제 판갑(板甲)과 백제 지역에서 발굴된 뼈 찰갑(札甲), 그리고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철제 찰갑을 통해 볼 수 있다.

삼국시대의 갑옷은 크게 찰갑과 판갑이 있는데 문헌이나 유물을 통해서 본 이들 갑옷은 매우 발달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찰갑은 작은 갑찰들을 먼저 가로로 연결한 후 다시 세로로 이어서 유동성이 있기 때문에 기마전투에 적당하였고, 판갑은 여러 가지 모양의 철판을 머리가 둥근 못이나 가죽 끈으로 연결 조립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보병전투에 유리하였다.

고구려에서는 벽화를 통해 볼 때 기마전을 주로 하였기 때문에 찰갑을 주로 착용하였고, 남부 지역에서는 출토유물을 통하여 볼 때 판갑이 많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보병전을 많이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5세기에 이르러 남부 지역에서도 기마전을 채택함에 따라 찰갑을 착용한 것이 유물을 통하여 확인된다. 특히 문헌 기록에 당나라 태종이 백제에 사신을 보내어 오색이 짙고 금빛이 찬란한 금칠도철갑(金漆塗鐵甲)을 구해다 입었다는 것으로 보아 중국보다 앞선 제조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고유한 갑옷 양식인 두루마기형 갑옷, 즉 포형(袍型) 갑옷이 등장하는데 『고려사』에 의하면 의갑(衣甲), 철갑(鐵甲), 의백갑(衣白甲), 백갑토모(白甲兎牟), 의주갑(衣朱甲), 자갑(紫甲) 등 재료와 색상이 다양한 갑주가 국가의 관리하에 제조되었으며, 무관들이 갑옷를 입을 때에는 투구는 뒤에 지고 다녔다. 이 밖에 군인들이 입는 군복으로는 전포(戰袍)라는 두루마기가 있었다.

갑주의 구체적인 형태나 구조에 대하여는 알 수 없다. 다만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3만명에 달하는 고려의 용호중맹군(龍虎中猛軍)이 모두 갑옷을 착용했다고 했는데, 이 갑옷은 위 아래가 붙어 있는 두루마기 형태이고, 어깨를 가려주는 부박(覆膊)이 없다고 했고, 또 다른 장군의 갑옷은 철찰(鐵札)을 검은 가죽으로 덮고 각각의 철찰을 무늬 있는 비단으로 꿰매어 서로 붙어 있게 했다는 기록을 통해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일본의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를 통하여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시 입었던 고려군의 갑옷이 갑찰을 연결하여 만든 길이가 긴 조끼형의 찰갑과 직물로 만든 포 형태의 갑옷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두루마기형 철제 찰갑이 큰 변화없이 사용되었다. 이 두루마기형 갑옷은 전체가 한 벌로 구성되어 있고, 앞쪽은 열려 있어서 이를 가죽끈으로 묶었다. 두루마기형 갑옷은 궁시를 주무기로 삼는 조선의 군사에게 매우 적합한 형태의 갑옷이었다.

이후 조선의 갑옷은 방호재인 금속제 혹은 가죽제 미늘을 가죽끈으로 서로 연결한 찰갑(札甲)이 일반적이었으나 그 밖에도 쇄자갑(鎖子甲), 경번갑(鏡幡甲) 등 여러 종류의 갑옷이 사용되었다. 이는 세조 때에 명나라가 조선과의 연합작전을 위해 조선군 갑옷의 색깔과 형태에 대하여 조선 조정에 물어왔을 때 세조가 조선의 갑옷 이름과 모양, 색상이 모두 제각각이어서 뭐라 단정해서 말하기 어렵다는 답변에서 잘 알 수 있다.

문헌에 나타난 갑옷의 종류는 도금동엽갑주(塗金銅葉甲胄)·피갑주(皮甲胄)·사사을갑주(沙士乙甲胄)·철갑주(鐵甲胄)·두석린갑주(豆錫鱗甲胄)·두정갑(頭釘甲)·경번갑·수은갑(水銀甲)·유엽갑(柳葉甲)·지갑(紙甲)·면갑(綿甲) 등이 있다. 이러한 갑옷의 재료는 대개가 단(緞)과 철(鐵)·두석(豆錫)·무명·전(氈)·종이를 사용하였다.

조선 후기의 갑옷도 두루마기 형태였으나 찰을 부착하는 방식은 전혀 달랐다. 조선 후기에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갑옷인 두정갑은 목면으로 만든 의복의 안쪽에 미늘(札)을 황동 못으로 박아 고정시킨 갑옷이다. 그밖에도 조선후기에는 목면으로 만든 면갑과 종이로 만든 지갑, 찰을 물고기 비늘모양으로 만들어 의복 표면에 붙인 어린갑(魚鱗甲) 등이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전투에 임하는 병사들 중에서 많은 인원이 갑옷을 착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세종 15년 야인정벌시 동원된 3천명의 군사에게 당시 조정에서 갑옷 1천여 부를 추가로 지급했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조선 후기 『만기요람』에도 당시 중앙군의 대부분이 찰갑이나 목면갑을 착용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문헌자료에 보병갑주·마병갑주 등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각 군종별로 갑옷의 형태가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황

국내외에서 발굴 내지는 전존되는 갑옷은 두석린갑주, 두정갑주, 피갑주, 쇄자갑주, 면갑주, 흉갑 등을 비롯하여 70여 점이다.

구분 명칭 국내·외 구분 및 수량 비고
출토 전존 해외
1 철갑주 10 18 7 35 전존혁제(傅存革製) 4점 포함
2 철제단갑 3 3 1. 함양상백리 1점
2. 고령 지산동 1점
3. 부산 동래 1점
3 금동경갑 2 2 1. 대구 달서 제38호
2. 천마총 고분
4 은제경갑 1 1 경주98호 고분
5 경번갑 1 1 정지장군
6 쇄자갑 1 1 창덕궁 소장
7 두석린갑 2 1 3
8 두정갑 11 3 14
9 피갑 2 6
10 흉갑 2 1 3
11 면갑 3 3
12 찰갑 1 1 유성룡 갑주동래성 해자 출토 찰갑
17 43 14 74
참고문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국사편찬위원회 편, 경인문화사, 2010)
『우리나라의 전통무기』(박재광 외, 전쟁기념관, 2004)
『조선의 무기와 갑옷』(민승기, 가람, 2004)
『한국군복식발달사』(국방군사연구소, 1997)
『한국무기발달사』(김기웅 외, 국방군사연구소, 1994)
『한국의 갑주』(이강칠, 문화재관리국, 1987)
『한국벽화고분』(김원룡, 일지사, 1980)
「조선시대의 갑주」(박가영,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관련 미디어 (4)
집필자
박재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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