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창(短槍)이라고도 한다. 창날 9치[寸], 자루 길이 9자[尺]이며, 무기로도 사용되었다. 창술도 18기 등 여러 가지가 있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수년에 한 번 각 군문의 무사들에게 보였던 관무재(觀武才) 초시(初試)의 시험과목이었다
이전 군대에서 신호를 보낼 때 가장 흔히 쓰인 도구가 깃발이었다. 따라서 깃발 자루 끝에 날을 달면 창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기창은 평시에는 부대를 표시하거나 신호를 전달하는 용도로 쓰이다가 전투가 벌어지면 무기로 쓰였던 것이다.
고려시대에 진법(陣法)을 운용할 때 각 대오의 위치와 정렬, 그리고 이동할 때 기창수가 진의 이동을 담당하였다. 특히 창에 달린 깃발을 이용하여 평시에는 부대의 구분, 신호용을 사용했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사』 여복지에는 “법가를 의장 소기창대와 장교 두 사람이 호위했는데, 특히 연등회 때에는 노부(의장)와 은간(작은 대나무)을 소기창대 20명이 호위했다.”라는 구절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이후 단병무예의 강화하기 위해 명나라에서 도입되어 사용되었다. 명(明)나라의 척계광(戚繼光)이 쓴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육반무예를 기초로 새로 완성한 『무기신식(武器新式)』의 십이반무예 가운데 하나이다.
기창은 그 형태가 장창과 동일하며, 다만 창 자루의 길이가 9척으로 짧고 창자루 끝에 깃발을 달아 사용한다. 창날의 길이는 9촌이고 창날 아래에 석반이 달려있다. 창자루에는 흰색 두줄과 검은색 세줄을 교대로 칠하며, 자루 끝에 철준을 달았다. 기치는 노란색이나 붉은 색을 사용한다.
기창은 조선 후기의 속오법에서 12명으로 구성된 대의 대장이 소지했으며, 그밖에도 각 부대에는 기치를 맡은 다수의 병사들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창검의 효용이 거의 상실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창이 실전용보다는 의장용 기창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존하는 몇 안 되는 창 유물도 대부분 기창의 일종이다.
『무예도보통지』에 의하면 기창은 병기라는 측면에서 장창 등 다른 병기에 비해 특별한 기능은 없지만 병기의 일종으로서 기창의 제도와 그 운용방법을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