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흥군 ()

함경도 영흥(조선지도 제1첩)
함경도 영흥(조선지도 제1첩)
인문지리
지명
함경남도 남부에 있는 군.
이칭
이칭
쌍성
내용 요약

영흥군은 함경남도 남부에 있는 군이다. 낭림산맥이 뻗어 내려 사수산, 백산, 병풍산, 오봉산 등이 솟아 고원 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용흥강이 남동류하고 있다. 고려 초기에 여진족을 토벌하고 영토로 편입하여 화주(和州)라고 개칭하였다. 몽골이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통치하였는데 공민왕 때 수복하고 화령부로 승격시켰다. 조선 건국 이후 영흥진(永興鎭)이 이성계의 외할아버지 최씨의 고향이라 하여 영흥부로 개칭하였다. 조선 태조의 탄생지로 영흥본궁, 준원전 등 유적이 있는 곳이다. 누에고치로 제조되는 명주와 대규모 우시장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정의
함경남도 남부에 있는 군.
개관

동쪽은 동해, 동북쪽은 정평군, 서쪽은 낭림산맥으로 평안남도 맹산군 · 양덕군, 북쪽은 영원군, 남쪽은 고원군 · 문천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6°35′∼127°35′, 북위 39°15′∼39°52′에 위치하며, 면적 2,192.25㎢, 인구 14만 6222명(1943년 현재)이다. 1개 읍 11개 면 282개 이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영흥읍 도정리이다.

자연환경

군의 서부에는 낭림산맥(狼林山脈)이 북에서 남으로 뻗어 북으로부터 사수산(泗水山, 1,747m) · 백산(白山, 1,724m) · 병풍산(屛風山, 1,353m) · 오봉산(五峰山, 1,289m) 등이 솟아 고원 지대를 이룬다. 또한, 주요 산으로는 국태산(國泰山, 330m) · 성력산(聖歷山, 100m) · 진수봉(鎭戍峰, 160m) 등이 있다.

하천은 서부의 고원 지대에서 발원하는 크고 작은 여러 냇물이 합쳐진 용흥강(龍興江)이 남동류하여 흐르다, 선흥면의 사수산에서 발원하여 내려오는 단속천(端屬川)과 합류하여 송전만(松田灣)으로 들어가는데, 그 유역에 충적지인 영흥평야가 형성된다. 이 평야는 군의 주요 생산 지대이자 거주 지대를 이룬다.

해안선은 106㎞에 불과하지만 동해안에서는 보기 드문 주1 해안을 이룬다. 호도(虎島)와 송전(松田)의 두 반도는 송전만을 이루며, 만의 안쪽으로 대저도(大猪島) · 소저도(小猪島) · 유도(柳島) 등의 작은 섬이 있다.

기후는 한난 해류가 흐르는 동해에 면해 있고, 또 낭림산맥이 겨울철에 북서 계절풍을 막아 주므로 같은 위도 상의 서부 해안 지방보다 온화하다. 연평균 기온 10.6℃, 1월 평균 기온 -4.5℃, 8월 평균 기온 24.3℃, 연 강수량 1,055㎜이다.

역사

[고대]

이 군에서 구석기시대 · 신석기시대의 유물 ·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영흥읍 영동리 · 용산리 · 소라리 등에서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 주2 · 동검 · 다뉴경(多紐鏡) 등이 발견되었으므로, 적어도 이 시기부터는 사람이 거주하였음이 확실하다.

이 군은 남 옥저(南沃沮)에 속하여 있다가 56년(태조왕 4) 태조왕의 정복으로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고구려 때 장령진(長嶺鎭) 혹은 당문(唐文) · 박평군(博平郡)이라 하였다. 244년(동천왕 18) 주3 장수 관구검(毌丘儉)의 침공 때 이 지방도 전란의 영향을 입었을 것이다.

삼국의 정립 시 신라한강 유역을 점령한 여세를 몰아 그 세력이 함경남도까지 미쳤다. 발해가 지금의 북청 땅에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를 설치하면서부터 함경도의 대부분이 발해 영토로 편입되었다고 본다. 733년(성덕왕 32) 신라가 주4의 요청으로 발해를 치기 위하여 함경도 남쪽 땅에 출병하였다가 큰눈 때문에 되돌아왔다.

[고려]

920년(태조 3) 동북경 방면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유금필(庾黔弼)을 골암성(鶻巖城)에 파견하여 일찍부터 이곳에 살고 있던 여진(女眞)족을 회유, 토벌함으로써 이 지역이 다시 고려 영토로 편입되었다.

고려 초에 화주(和州)라 개칭하고, 955년(광종 6) 처음으로 주5를 쌓았다. 995년(성종 14) 화주 안변도호부(和州安邊都護府)로 고쳤다가 1018년(현종 9) 화주(和州) 방어사(防禦使)로 내렸다.

1044년(정종 10) 거란족과 여진족에 대한 항구적 방어선으로 압록강구의 위원진(威遠鎭)으로부터 정평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완공하였다.

당시 이곳에는 여진족의 내부자(來附者)를 맞는 화천관(和川館)이 있었다. 1258년(고종 45) 11월 조휘(趙暉) · 탁청(卓靑) 이 동북면병마사 신집평(愼執平)을 죽이고 화주 이북의 땅을 들어 항복하자, 몽고는 화주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여 통치하였다.

1356년(공민왕 5) 공민왕반원정책으로서 유인우(柳仁雨)를 파견하여, 이자춘(李子春)의 내응을 얻어서 화주를 수복하여 쌍성총관부를 혁파하고 목(牧)을 설치하였다. 이어서 주6을 점령하고,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북진의 노력을 계속하였다. 1369년 화령부(和寧府)로 승격되었다.

[조선]

1393년(태조 2) 이곳의 영흥진(永興鎭)이 태조의 외할아버지 최씨의 향(鄕)이라 하여 이 이름을 따서 영흥부로 개칭하였다. 이곳은 태조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1403년(태종 3) 부인(府人) 조사의(趙思義)의 난 때문에 군으로 강등되었다가 이듬해 부로 복구되었다.

1416년 주7의 도치(道治)를 함흥으로 옮기면서 화주목으로 강등시켰다. 1426년(세종 8) 2월 영흥대도호부로 고쳤으며, 평천(平川) · 정변(靜邊) · 영인(寧仁) · 장평(長平) · 요덕(耀德)의 5사(社)가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1432년 호구는 2,191호, 8,524인이었다. 1456년(세조 2) 이곳에 진(鎭)을 설치하였다. 이시애(李施愛)의 난으로 인하여 1470년(성종 1) 함흥부를 군으로 강등시키고, 관찰사영을 다시 영흥에 옮기고 영흥부로 개편시켰다.

1509년(중종 4) 관찰사영을 또 함흥으로 옮기고 영흥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토(加藤淸正)가 함경도를 침공하여 이곳도 왜병에게 유린당하였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 때 청군의 일부인 몽고병이 함경도를 거쳐 철수하였기 때문에 역시 많은 해를 입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1759년(영조 35) 당시 13사의 방리로 이루어져 있었고, 호구는 1만 1136호, 4만 7971인이었다.

[근대]

1895년 5월 부 · 군제를 실시할 때 함흥부 영흥군으로 개편되었다. 1896년 전국을 13도제로 고칠 때 함경남도 영흥군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영흥면 등 12면으로 편성되었으며, 군청 소재지는 영흥면 삼사리였다.

호구는 1937년에 2만 2658호, 13만 2092명, 1943년에 2만 4537호, 14만 6222명이었다. 1943년 영흥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19년 3월 5일 영흥면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진상직(陳相稷) 등이 주동이 되어 만세시위를 벌였고, 16 · 17 · 21일에도 잇달아 시위가 일어났다. 1933년 10월 인흥면 영풍리 농민 조합원들이 야학 개설 문제로 일본 경찰과 수차 충돌하여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유물 · 유적

순령면에는 조선태조의 아버지인 이자춘(李子春)의 구저(舊邸)인 영흥본궁, 이성계(李成桂)의 출생을 기념하는 준원전(濬源殿), 오랫동안 행정청이었던 진평면 진축산 위에 있는 화주영허(和州營墟), 영흥향교 등이 있다.

고령면 가진리에서 인흥면 용연리 등 9개 이와 덕흥면 지인리 외 5개 이, 장흥면 정동리 외 2개 이, 선흥면 평천리 등을 연결하는 고려의 천리장성이 정평군과 경계를 이루면서 축성되었는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고령면 연동리 서남방 구릉 위에 연동리 · 연풍리 · 청흥리를 잇는 석축으로 된 장안성지(長安城址)가 있다. 인흥면 성흥리에 주위 약 900m의 석성지가 있으며, 진평면 흥성리에도 역시 석성지가 있고, 영흥읍 삼사리에 성력산성지가 있다. 선흥면 평천리에 1061년(문종 15)에 축성하여 1393년(태조 2)에 개축하고 영흥진이라고 하였으며, 뒤에 다시 평주진(平州鎭)이라 하였던 성지가 남아 있다.

요덕면 용상리 · 백동리 · 성리 · 용천리를 연결하는 요덕진지(耀德鎭址)가 용천 마을 북동쪽의 작은 능선 위에서부터 시작되어 있는데, 이 진지는 1023년(현종 14) 축성되었고 공민왕 때 개축되었다. 횡천면 산성리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고철옹성지(古鐵甕城址)라고 하는 토성이 있다. 인흥면 성흥리, 진평면 한동리 · 진전리 등지의 산정에 봉수지가 있다.

불교 유물 · 유적으로는 인흥면 성흥리에 지흥사(地興寺), 덕흥면 한봉리에 안불사(安佛寺), 선흥면 용남리에 진정사지(鎭靜寺址)가 있다. 이 절터에 탑재(塔材) 및 ‘도광(道光) 15년’(1835, 헌종 1)이라는 기록이 새겨져 있는 석비 · 부도 · 석불 등이 남아 있다.

교육 · 문화

조선 초기부터 읍의 남산 바깥에 영흥향교가 건립되어 있었는데, 1398년 읍의 서남쪽 1㎞ 지점으로 이전되었으며, 1716년(숙종 42) 다시 지금의 현산(玄山) 아래로 옮겨져 많은 유학자들을 배출하였다. 1612년(광해군 4) 흥현서원(興賢書院)이 영흥읍 도정리에 건립되었는데, 이 서원의 정일당(靜一堂)은 준재를 배양하던 이름이 높은 학당이었다.

1675년(숙종 1) 건립된 정충사(精忠祠)에서도 많은 유학자가 배출되었다. 1735년(영조 11) 읍의 북쪽에 건립된 용강서원(龍江書院)은 강 위에서 허리를 잘려 유명한 일화를 남긴 박순(朴淳)을 제향하며 유학의 강론에 열을 올렸다.

유학에 전념하던 향교는 개화기에 들어서면서 차츰 신교육기관으로 탈바꿈하였는데, 1912년 영흥공립농업보습학교가 개교하면서 그 유명하던 명륜당(明倫堂)도 농업보습학교의 강당이 되었다. 이 2년제 간이학교는 1942년 다시 4년제 농업학교로 학제가 개편되었다.

특히 사립학교가 많이 설립되어 가흥(嘉興) · 영생(永生) · 용문(龍門) · 영명(永明) · 덕신(德新) · 요흥(耀興) · 선명(宣明) · 미흥(美興) · 흥명(興明) · 동흥(東興) · 영명(寧明) 등의 사립학교가 있었으나, 이들은 대부분 일제에 의해 공립보통학교로 각각 개편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엽까지 문명(文明) · 인명(仁明) · 광동(光東) · 창송(昌松) 등의 사립학교만은 끝끝내 공립보통학교로 개편하지 않고 버티어 나갔으니, 영흥의 교육열과 자주정신을 여기서 짐작할 수 있다. 또한 12개 읍 · 면에 1개교 이상의 초등학교(총 22개교, 분교 2개교)가 있었던 점으로도 그 교육에 대한 열성을 엿볼 수 있다. 한편 1919년 조직된 영흥청년회는 반일 투쟁과 계몽 · 체육 진흥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종교 상황으로는, 영흥읍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안불사를 중심으로 상당수의 불교신자가 있었다. 천도교구(天道敎區)는 함경남도에서 손꼽히는 대교구로 교세 확장에 힘썼으며, 개신교천주교는 크게 전파되지 못하였다.

이 고장의 설화로는 영흥만 형성설화, 범섬 · 곰섬 · 돼지섬 등이 생긴 전설, 비류수 연기설화와 용강서원의 연기사화인 박순의 마자풍간(馬子諷諫) 이야기 등 신화 · 전설이 많다.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 이성계가 소년 시절에 용흥강 물을 가르고 도망치던 이야기가 있다.

이성계는 어릴 적에 골목대장이었고, 항상 동네 아이들과 함께 전쟁놀이를 즐겨 하였다. 한번은 저녁때 헤어지면서 여러 아이들과 약속하기를 “내일 아침은 해가 저 느티나무 위로 솟기 전에 모인다. 만약 늦으면 낫으로 목을 자른다.”라고 하면서 헤어졌다. 그 이튿날 아침 약속 전에 다들 모였는데, 한 아이가 머리를 빗느라고 그만 늦었다. 그 아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서둘렀지만, 어머니는 약속을 몰랐고, 알게 된 뒤에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오랫동안 감지 않았던 아들의 머리를 감겨 주고 빗어 주느라고 늦어지고 말았다.

어느덧 해는 느티나무 위로 솟았고, 여러 아이들은 초조하게 기다리면서 골목대장인 이성계가 어찌하는가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는 어머니 때문에 늦었으니 미안하다고 머리를 긁적거리며 사죄하였다. 이성계는 두말 않고 서 있다가 늦은 아이 곁으로 다가가서 미리 준비하여 둔 낫으로 아이의 목을 쳤다. 동네 사람들은 놀라움과 분노로 아우성이었다. “저놈 죽여라!”, “저놈 살려 두면 큰일 난다.” 하고 손에 몽둥이 · 꼬챙이 등을 가지고 노인 · 장정 할 것 없이 몰려왔다. 이성계는 강을 건너 산을 넘어 함흥까지 도망쳐서 반룡산(盤龍山)에 숨어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고장은 명주의 산지로 부인들의 질병이 많아 어머니를 잃은 아이들이 많다. 따라서 그에 따르는 민요로 「신고산타령」 · 「삼삼이노래」 · 「다복녀」 · 「칠석요」 · 「누에치기노래」 · 「명주 짜는 노래」 등의 애원성 민요가 전한다.

그중 「명주 짜는 노래」는 다음과 같다. “틀을 놓고 잉애 걸고/바로 밟고 왼발 밟고/삐걱 철썩 북을 치네/비단 같은 명주 폭을/앞채에 둘둘 감아/누굴 주랴 명주로다/이봅소 저 낭군아/남의 허리 보지 마소/이틀 명주 다 짜걸랑/내일 밤은 시름 놓고/꼭꼭 끼고 잠 잡세다/명주 감고 잠 잡세다.” 이 밖에도 「단오요」 · 「멱 감고 말리는 노래」 등이 전한다.

이 고장의 민속놀이로는 윷놀이, 널뛰기, 수수깡으로 이삭 만들어 달기 등이 전한다. 2월 1일 아침에는 장작불 숯덩어리로 1년 가뭄과 장마보기를 하는데, 숯불 열두 개를 피워서 식히면 숯이 희거나 검어 장마를 점친다고 한다. 단오날에는 다른 지방과 같이 그네뛰기 · 씨름 등의 민속놀이를 행한다.

동제로는 기양제라 하여 정월과 7월에 제를 지내는데, 일종의 여제(厲祭)로 마을 근처의 평탄한 잔디밭 고목 숲에 100여 평 정도의 제단이 있고, 서북쪽으로 제단을 만들어 동남쪽에 모여 제를 지낸다. 큰 동네에는 이런 제단이 두세 군데 있어서 동민이 나뉘어 제를 지낸다.

제단은 말발굽 꼴로 되어 있는데, 제관은 미리 동네에서 정하고 그 사람이 주관하여 제수를 마련하는데, 생선류를 비롯하여 제찬과 떡 등을 각자 집에서 준비하고 제의 희생인 소 · 돼지 등을 제관의 주관하에 동네에서 모아서 준비한다. 제물을 만들어 차린 뒤 제관이 꿇어앉아 제를 올리고 주8주9하여 주10 주11을 읽는다.

제를 지낸 뒤에는 약간의 고기와 주찬은 주14하고 여러 사람이 나누어 먹는다. 산신제는 대개 영산대천신(靈山大川神)에게 지내는데, 심산유곡을 찾아가 미리 준비한 백미로 정화수를 떠서 메를 지은 뒤 산천에 축원하되 일년 농사의 풍년과 주15, 가정의 안녕을 비는 것이다.

산업 · 교통

동부의 평야 지대에서는 벼농사가 활발하여 연간 약 3만 7000석(1942년 현재)의 쌀이 생산되며, 서북부의 고원 지대에서는 밭농사가 활발하여 조 · 피 · 콩 · 옥수수 · 밀 등이 산출되는데, 그 중에서도 피와 콩의 생산량은 도내에서 손꼽힌다. 이들 곡물은 대체로 지방 주민들의 식량으로 소비된다. 농가의 부업으로는 양잠과 축우(畜牛)가 일반적이다.

영흥 지방의 누에고치로 제조되는 명주와 대규모의 우시장은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다. 수산업도 비교적 발달되었는데, 연안의 어획 종류로는 명태 · 고등어 · 연어 · 정어리 · 대구 · 도미 · 굴 등이 있다. 특히 호도면의 소응진(巢鷹津), 고령면의 가진(加津) · 백안(白安)은 이상적인 어장으로 손꼽힌다.

광산물로는 금 · 납 · 아연 · 흑연 · 석탄 · 철 등이 산출되며, 특히 흑연은 평안계(平安系) 지층에 많은 양이 매장되어 있다. 1913년 이래 장흥면 정동리와 흑석령(黑石嶺) 일대에서 다량 채굴되어 왔다.

한편, 상업 활동이 활발하여 각 면 소재지마다 5일장이 열리는데, 주로 농산물 · 명주 · 해산물 · 공산품 · 소 · 돼지 등이 거래된다. 정기 시장으로는 영흥우시장이 영흥읍 운평리에서 1일 · 6일, 영흥보통시장이 영흥읍 남산리와 도정리에서 5일 · 10일, 왕장장이 왕장리에서 1일 · 6일, 인흥가축시장이 인흥면 신풍리에서 1일 · 6일, 마장장이 덕흥면 신흥리에서 4일 · 9일에 열린다.

이 밖에도 선흥면 성리의 선흥장과 선흥가축시장, 횡천면의 횡천장과 횡천가축시장 등이 있다. 해안 지방에서 개장되는 간이 시장인 고령면 가진리의 가진장(加津場)과 호도면 원평리의 원평장(原平場)에서는 주로 해산물이 거래된다.

동부 평야 지대에는 함경선이 남북으로 부설되어 영흥 · 마장 · 범포 · 왕장 등의 역이 설치되었고, 국도가 철도와 병행하여 달리므로 교통은 불편하지 않다. 그러나 서부의 고원 지대에는 몇 갈래의 지방도가 있을 뿐이며, 평안남도와의 교통도 애전현(艾田峴)을 넘어 겨우 맹산 지방에 이르는 길뿐이어서 불편하다.

고적으로는 순령면 정자리에 이태조의 출생을 기념하는 준원전, 역대의 행정청이던 화주영허가 있으며, 명승지로는 영흥읍 신흥리의 초진동, 고령면의 해망치(海望峙), 용흥강변의 구암(龜巖), 1930년에 발견된 인흥면의 마장온천(馬場溫泉)과 해채산의 동쪽에 해채산굴(海菜山窟)이 있다. 사찰로는 덕흥면 성불산에 안불사, 영흥읍 남산리에 화양사 등이 있다.

인흥면 의성리에 있는 마장온천은 조선 시대부터 이용되다가 묻혀 버렸는데 1930년 다시 개발되었다. 분출량이 많으며, 수온이 높고, 피부병에 특효인 유황이 함유되어 있어 이용객이 많다. 온천이 드문 지방이므로 사계절 내내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편의 시설도 갖추게 되었다.

해채산굴은 석회암으로 된 동굴로, 굴 안에는 맑은 물이 흐르며, 천장에는 황백색의 종유석이 고드름처럼 달려 있고, 바닥에는 주16이 자라 있으며 곳곳에 수심이 깊은 못도 있다. 예로부터 널리 알려진 관광지로 연중 내내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

영흥읍 신흥리에 있는 초진동(超塵洞)은 명승지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세심폭포(洗心瀑布)와 거대한 반석 위를 흐르는 푸른 물의 장려함이 장관을 이룬다. 물줄기를 따라 좌우로 전개되는 반석과 소나무의 조화는 봄 · 여름 · 가을에 걸쳐 끊임없이 관광객의 발길을 이끈다. 반석에 새겨져 있는 초진동 · 세심폭 · 탄금대(彈琴臺) · 소헐대(小歇臺) · 쇄풍정(灑風亭) 등의 문자는 이곳이 고래로 유명한 명승지임을 말하여 준다.

읍 · 면

[영흥읍 永興邑]

군의 중앙 남부에 있는 읍. 면적 76.76㎢, 인구 1만 7971명(1944년 현재). 읍 소재지는 남산리이다. 조선 초기까지는 제량사(濟梁社)라 하였으며, 그 뒤 홍인사(洪仁社)로 개칭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면으로 되었다.

1942년 복흥면(福興面)을 편입하여 영흥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광대한 영흥평야를 관류하는 용흥강변에 위치하여 대부분의 지역이 평야 지대이며, 서부가 다소 구릉지로 높은

개답주17 사업 후 수리 시설이 잘되어 쌀 · 콩의 곡창 지대를 이루며, 동시에 이 지방 물산의 집산지로서의 구실도 한다. 양잠업이 도내에서 가장 발달하였는데, 이곳에서 생산되는 견직물은 ‘영흥주(永興紬)’라 하여 조선 시대부터 알려져 왔으며 각지로 반출된다.

일상의 거래 활동은 쌀 · 콩 · 명주 · 생선 등의 거래가 많아 군에서 가장 큰 규모의 남산리장에서 이루어진다. 이 밖에 행정 · 교육 · 금융 및 복지 시설이 이곳에 집중되어 있어 읍내뿐만 아니라 군내 주민 생활의 중심지 구실을 한다. 역사적으로도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한 군사 및 행정의 중심지였으며, 이성계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교통은 남북 간을 이어주는 함경선이 지나며, 원산회령 간 국도와 동서 간을 이어 주는 국도가 이곳에서 교차하여 편리하다. 명승지로는 신흥리에 초진동이 있으며, 유적으로는 성력산에 산성터가 남아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교가 있다.

남산(南山) · 용남(龍南) · 삼사(三思) · 도랑(都浪) · 도정(都井) · 운평(雲坪) · 중흥(中興) · 연동(硯洞) · 필석(筆石) · 남성암(南星巖) · 성북(城北) · 사현(社峴) · 신흥(新興) · 용원(龍源) · 용연(龍淵) · 상산(商山) · 반룡(盤龍) · 내동(內洞) · 신남(新南) · 상마산(上馬山) · 영풍(永豊) · 중마산(中馬山) · 팔정(八井) · 형탄(荊灘) · 하국사(下國寺) · 문흥(文興) · 하태(下泰) · 상태(上泰) · 국봉(國峰) · 중면(中面) 등 30개 이가 있다.

[고령면古寧面]

군의 동단에 있는 면. 면적 75.00㎢, 인구 8,108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안동리이다. 본래 영인면(寧仁面)이었으나 1912년 인흥면과 호도면이 각각 분리되어 남은 지역만으로 고령면이 되었다. 지형상 동고서저의 경사면을 이루며 동해에 면해 있고, 계곡에 경지와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다.

해안선을 따라 북부에 형성되어 있는 가진 · 백안어장은 어획량이 풍부하다. 남부 동해안에는 석호가 발달하여 있으며, 상포(上浦)와 하포(下浦)는 중요한 관개용수원이다. 농업과 수산업 종사자 외에도 모로리 · 안동리 일대의 일부 주민은 금광업에 종사한다.

주민은 안동리와 가진리를 2대 중심권으로 하여 생활하며, 남부 주민은 호도면의 원평리장과 학교를 이용하고, 북부 주민은 인흥면 철도역의 왕장리장을 이용한다. 각 마을은 해안선 도로로 연결된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안동(安東) · 백안(白安) · 비동(枇洞) · 청학(靑鶴) · 삼봉(三峯) · 가진(加進) · 신흥(新興) · 신성(新城) · 연동(蓮洞) · 연풍(淵豊) · 청흥(淸興) · 조산(藻山) · 중흥(中興) · 풍동(豊東) · 무학(武鶴) · 모로(慕老) · 명장(明場) · 이동(梨洞) 등 18개 이가 있다.

[덕흥면德興面]

군의 동북부에 있는 면. 면적 74.17㎢, 인구 1만 952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신풍리이다. 영흥평야의 중앙을 동남 방향으로 흐르는 용흥강 상류의 동편에 위치하여 북쪽 경계에는 정평군과의 경계를 이루는 북고남저의 산맥이 있다. 동남부는 평야 지대로 비옥한 경지에 인구가 집중하여 있다.

주된 산업은 농업이며, 마장역이 있는 신풍리는 예로부터 영흥군내 큰 시장이 있어 농산물의 교역이 활발하여 상업이 발달하였다. 농암리에 있는 금광은 12만 평에 이르며,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주민의 생활은 내동리와 동부평야의 신풍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철도와 국도가 남부를 동서로 지나며, 마장역이 설치되어 있다. 명승지로는 한봉리의 성불산에 안불사가 있다. 무학대사가 이성계의 기원소(祈願所)로 세운 안불사는 군내 제일의 큰 절로 유명한 은행나무와 향나무 그리고 송림이 울창하여 사계절 관광객이 찾아든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신풍(新豊)내동(內洞) · 작동(鵲洞) · 신흥(新興) · 쌍흥(雙興) · 부남(富南) · 신창(新昌) · 직동(直東) · 직서(直西) · 백남(白南) · 백북(白北) · 동한봉(東鷳鳳) · 한봉(鷳鳳) · 덕고개(德古介) · 용천(龍川) · 청동(淸洞) · 청남(淸南) · 청북(淸北) · 광성(廣城) · 원흥(元興) · 풍성(豊城) · 화산(禾山) · 농암(籠巖) · 풍전(豊田) · 구상(龜上) · 구평(龜平) · 구하(龜下) · 풍양(豊陽) · 금파원(金坡院) · 지인(智仁) 등 30개 이가 있다.

[선흥면宣興面]

군의 북부에 있는 면. 면적 593.19㎢, 인구 1만 6720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성리이다. 1907년 선덕면(宣德面)으로 되었다가 1910년 선흥면으로 개칭되었다.

단속산을 비롯하여 평안남도와 정평군과의 경계에 1,000m 이상의 산이 많이 있어 고산 지대를 이룬다. 대부분의 지역이 500m 이상의 고지이며, 면의 경계나 북부는 1,000m 이상의 고지로 되어 있다. 그러나 용흥강 상류에 계곡이 발달하여 대부분의 주민이 이곳에 거주한다. 주로 경사지에서 밭농사가 행하여지며, 조 · 콩 · 감자 등이 생산된다. 이 밖에 소를 사육하며, 목재의 생산이 많다.

교통은 하천의 계곡에 형성된 취락마다 도로가 통하고, 영흥과 평안남도를 잇는 국도가 면의 남부를 지나므로 불편하지 않다. 교통상 요지이며 면 소재지인 중앙의 성리와 남부의 용반리를 2대 중심권으로 하여 주민의 생활이 불편 없이 이루어진다.

용흥강의 지류인 불류수(佛流水, 또는 沸流水)는 사계절 장관을 이루어 국왕이 사신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또 용신리에 있는 진정사에는 불교의 승과 관련된 설화가 전하여진다. 유적으로는 용남리 진정사지에 탑비 · 부도 · 석불 · 석비, 평천리에 평주진성터가 있으며,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교가 있다.

성(城) · 용반(龍盤) · 용상(龍上) · 연상(囦上) · 용연(龍淵) · 용신(龍神) · 용남(龍南) · 서상(西上) · 용암(龍巖) · 용운(龍雲) · 용연(龍淵) · 평천(平川) · 문상(文上) · 문흥(文興) · 증하(曾下) · 신흥(新興) · 검산(劍山) · 완문(完文) · 자산(慈山) · 남흥(南興) · 향봉(香峰) · 향산(香山) · 태명(太命) · 인풍(仁豊) 등 24개 이가 있다.

[순령면順寧面]

군의 남부에 있는 면. 면적 51.70㎢, 인구 1만 229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신정리이다. 조선 시대 순령사(順寧社)였던 지역으로 큰 변동이 없이 순령면으로 이어졌다.

북쪽의 경계를 따라 용흥강이 흐르며, 대부분의 지역이 평야 지대이다. 비옥한 충적평야에 1930년대 개답 사업과 관개 수리 공사가 추진되어 높은 생산량의 곡창 지대를 이룬다.

남북으로 뻗은 국도와 함경선 철도가 서부를 지나며, 또한 동서 간선도로가 면 가까이 지나고 있어 교통은 불편하지 않다. 유적으로는 정자리에 이태조의 출생을 기념하는 준원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신정(新亭) · 유북(柳北) · 유남(柳南) · 원천(原川) · 흥남(興南) · 작산(鵲山) · 쌍화산(雙花山) · 화도(禾島) · 소라(所羅) · 대흑석(大黑石) · 소흑석(小黑石) · 광진(廣津) · 정자(亭子) · 경암(鯨巖) · 풍흥(豊興) · 풍동(豊東) · 주남(州南) · 송치(松峙) · 성남(聖南) · 중양(中陽) · 태평(太平) · 풍남(豊南) · 덕양(德陽) · 능동(陵洞) · 갈전(葛田) · 풍양(豊陽) · 덕포(德浦) · 용천(龍川) · 두산(頭山) · 송전(松田) · 석북(石北) · 석남(石南) 등 32개 이가 있다.

[억기면憶岐面]

군의 중동부에 있는 면. 면적 53.11㎢, 인구 1만 62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조양리이다. 용흥강과 덕지강 하구의 토사가 퇴적된 삼각주 평야 지대에 위치한다. 따라서, 저습하므로 배수 · 수리 사업을 통하여 벼농사가 행하여지며, 해안 지대에는 갈대가 무성하다.

농업이 주된 산업이며 수산업도 발달하였다. 갈대로 짜서 온돌바닥에 까는 주12 제조업도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유도에서는 염전업이 크게 행하여지며, 양강에서는 계절에 따라 연어가 많이 잡힌다. 강과 하구의 어패류에 폐스토마 균이 있어 이곳의 풍토병의 원인이 된다.

교통은 인접한 진평면을 지나는 국도를 이용하며, 이 밖에 남북 지방도로가 면의 중앙을 지난다. 따라서, 진평면 진흥리의 진흥장을 많이 이용한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조양(朝陽) · 중남(中南) · 동세(東細) · 남세(南細) · 북세(北細) · 신흥(新興) · 인흥(仁興) · 양상(兩上) · 선흥(善興) · 미양(美陽) · 흥암(興巖) · 봉양(鳳陽) · 신성(新城) · 와우(瓦隅) · 양중(兩中) · 삼기(三岐) · 신양(新陽) · 탑산(塔山) · 소산(昭山) · 양하(兩下) · 덕상(德上) · 덕중(德中) · 남서(南西) · 남동(南東) · 인성(仁成) · 구만(九灣) · 용호(龍湖) · 율산(栗山) · 오포(梧圃) · 치(峙) · 덕하(德下) 등 31개 이가 있다.

[요덕면耀德面]

군의 서북단에 있는 면. 면적 455.71㎢, 인구 1만 2895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중신리이다. 북쪽 경계에 평안도계의 백산, 서남쪽에 병풍산, 동쪽에 장치산(長峙山, 1,504m)이 있어 대부분의 지역이 산지이다. 용흥강의 상류인 입석천이 중앙을 남류하며 그 계곡이 주요 생활 무대가 된다.

산간 지방의 일반적 특성인 계곡의 밭농사가 대부분이지만, 부녀자들의 양잠 · 명주 짜기 등이 활발하다. 교통은 영흥읍에서 횡천과 선흥면을 연결하는 3등도로가 남부를 지나며, 여기서 갈라진 도로가 입석천을 따라 서부로 뻗어 있다.

유적으로는 요덕면에 요덕진지, 인상리에는 임진왜란 때 이태조의 영정이 피난차 이곳을 넘어갔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월왕령(越王嶺)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중신(重新) · 인상(仁上) · 인흥(仁興) · 남산(南山) · 백동(柏洞) · 용상(龍上) · 북평(北坪) · 평전(坪田) · 소숙(小淑) · 입석(立石) · 용천(龍泉) · 하신(下新) · 화전(花田) · 성(城) · 대숙(大淑) 등 15개 이가 있다.

[인흥면仁興面]

군의 동북부에 있는 면. 면적 114.11㎢, 인구 1만 3797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포중리이다. 조선 시대 인흥사(仁興社)였던 지역으로, 뒤에 인흥면으로 개편되었다. 지형상으로 영흥군과 정평군의 북쪽 경계를 이루며 북북서 방향의 산맥의 연장이 면을 양분한다.

이는 고려 시대의 장성(長城) 축조선이기도 하다. 북부는 금진강(金津江) 유역으로 정평군 신상면과 평야로 연결된다. 대부분이 비옥한 평야 지대로 농업이 주업을 이루며, 부녀자들의 양잠 · 견직업도 발달하였다.

양질의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전국적으로 이름이 나 있다. 특히, 범포호(范浦湖) 중심으로 50만 평에 이르는 인흥금광의 주13 생산은 전국에서 산출량이 가장 많다. 주민의 거래 활동은 동북부의 중심인 왕장리시장에서 주로 이루어진다.

교통은 함경선이 중앙을 통과하여 서쪽으로 지나며, 왕장역이 설치되어 있고, 이와 병행하여 국도가 지나가므로 편리하다. 주민의 교육 및 의식수준이 높아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 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특히 영풍리 야학 사건을 비롯하여 농민 사건 등 널리 알려진 대규모의 집단 항거가 있었다.

유적으로는 성흥리에 석성지와 지흥사가 있다. 의성리에 마장온천(일명 潭泉)이 있는데, 약효가 있다 하여 사계절 내내 관광객이 모여든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포중(浦中) · 가동(0x954f洞) · 영풍(永豊) · 동소치(東蘇峙) · 방축(防築) · 녹상(鹿上) · 원거(院巨) · 용연(龍淵) · 왕상(旺上) · 왕하(旺下) · 용산(龍山) · 성흥(城興) · 처인(處仁) · 능동(菱洞) · 성현(聖峴) · 원동(元東) · 원상(元上) · 금피(金皮) · 원서(元西) · 선앙치(善仰峙) · 송현(松峴) · 장치(長峙) · 향봉(香峰) · 천동(泉洞) · 내평(內坪) · 내남(內南) · 포하(浦下) · 동산(東山) · 은봉(銀峯) · 화흥(化興) · 작동(鵲洞) · 화성(化城) · 상평(上坪) · 동평(東坪) · 동원(東原) · 남양(南陽) · 동양(東陽) · 동천(東川) · 풍왕(豊旺) · 의성(義成) · 미흥(美興) 등 41개 이가 있다.

[장흥면長興面]

군의 중앙 북부에 있는 면. 면적 84.50㎢, 인구 9,168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원하리이다. 조선 시대 장흥사(長興社)였던 지역으로 구역상 큰 변동이 없이 장흥면으로 이어졌다.

영흥평야의 서북 한계선 상에 위치하며, 남쪽의 경계를 따라 용흥강의 지류가 흐른다. 낮은 평야 지대인 동남부는 비교적 인구가 조밀하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한다. 정동리에 양질의 흑연광이 있는데 매장량이 막대하여 대대적으로 개발되어 수출된다. 면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국도가 동부를 지나고, 이 국도와 병행하여 서부에 남북 간의 도로가 있어 인접 지역과의 교통 체계가 잘되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원하(院下) · 염교(濂郊) · 원상(院上) · 송산(松山) · 정동(鼎東) · 정서(鼎西) · 연치(囦峙) · 원산(元山) · 인상(仁上) · 인하(仁下) · 삼봉(三峯) · 문성(文城) · 신흥(新興) · 정동(正洞) · 현흥(賢興) · 동하(東下) · 초상(草上) · 초하(草下) · 봉양(鳳陽) · 봉남(鳳南) · 인흥(仁興) 등 21개 이가 있다.

[진평면鎭坪面]

군의 동부에 있는 면. 면적 67.08㎢, 인구 1만 2405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진흥리이다. 고려 시대 장평진(長坪鎭)이었다가 조선 시대 장평사(長坪社) · 장평현(長坪縣)이라 불렸으며, 1914년 진평면으로 되었다. 이는 진(鎭)이 있던 곳이란 뜻에서 유래되었다. 영흥평야를 지나는 용흥강 하류의 동편 구릉 지대와 남부의 인접 도시로 구성되어 있다.

인구밀도가 군내에서 가장 높으며, 동부 영흥평야의 중심지로 예로부터 교통 및 군사적 요지이다. 농업이 주된 산업이지만 용흥강 삼각주에서의 노점 제조, 저도(猪島)의 굴양식, 대덕산 중심의 금광업, 그리고 군내의 시장 중심지로서의 상업 등 각 분야가 골고루 발달하였다. 특히, 굴 양식은 한때 그 생산량이 전국에서 으뜸이었으며, 쪄서 말린 것이 중국으로 수출되었다.

국도가 면을 지나며 도내 남북 간선도로가 진흥리에서 교차되고, 용흥강의 수로도 이용할 수 있어 예로부터 교통상의 요지이다. 서쪽으로는 영흥평야, 동쪽으로는 바다에 면하는 전략상의 중요한 위치인 만큼 유적이 많다.

진수리의 북쪽에 있는 진수봉은 평야에 우뚝 솟아 평야는 물론 송전만 내해까지 조관할 수 있는 전략적 요지이다. 963년(광종 14) 성을 쌓아 적의 침입을 방어하였던 옛 성터로서 화주영허가 산 위에 있으며, 봉수대도 있다. 천황리의 천황산(天皇山)은 경치가 아름다워 관광지로 이름나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방내미(芳乃美) · 원상(原上) · 소응진(巢鷹津) · 원평(原平) · 신장(新獐) · 구장(舊獐) · 두무(斗武) · 용미(龍米) · 송보(松寶) · 갈고치(葛古峙) · 소포(蘇浦) 등 11개 등 12개 이가 있다.

[호도면虎島面]

군의 동남부에 있는 면. 면적 35.79㎢, 인구 3,981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방구미리이다. 본래 고령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1912년 11개 이가 분리되어 호도면으로 되었다.

남으로 길게 뻗은 반도를 중심으로 인접한 작은 섬들로 되어 있으며, 원산에서 북으로 뻗은 갈마반도와 함께 송전만 · 영흥만을 형성한다. 반도에는 동해안에서 흔한 석호인 신장리호(新獐里湖)가 있다.

산업은 농업과 더불어 수산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수산업 종사자가 취업 인구의 약 30%이다. 주변의 여러 섬에서는 굴 · 해삼 · 피조개 등의 채집과 양식도 행하여진다. 교통은 반도부의 동해면에 잘 정리된 군용도로로 내륙과 연결되며, 수로상으로는 가까운 원산항을 이용하는데 정기 연락선이 운항되어 수상 교통이 편리하다.

울창한 송림과 백사장의 전경은 여름의 위락지로 적합하지만 군용지로 이용되어 출입이 통제된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방내미(芳乃美) · 원상(原上) · 소응진(巢鷹津) · 원평(原平) · 신장(新獐) · 구장(舊獐) · 두무(斗武) · 용미(龍米) · 송보(松寶) · 갈고치(葛古峙) · 소포(蘇浦) 등 11개 이가 있다.

[횡천면橫川面]

군의 서남부에 있는 면. 면적 511.13㎢, 인구 1만 7213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대평리이다. 동서로 길며 서부와 남부가 높은 지형을 이룬다. 남류하는 지류들을 모아 용흥강이 동류한다. 용흥강 상류인 입석천(立石川) · 단굴천(端屈川) 등 세 갈래의 물줄기가 계곡을 이루는 산간지대가 주민의 주요 생활 무대이다.

남쪽으로 덕지강 유역의 고원과의 높은 분수령인 면계와 서쪽으로 평안남도와의 경계에는 1,000m 이상의 오봉산(五峰山, 1,289m) · 영봉(靈峰, 1,135m) · 철옹산(鐵瓮山, 1,095m) 등이 솟아 있다. 주로 밭농사와 화전농업이 행하여진다. 용흥강과 덕지강의 유역 관개로 교통상의 편의에 따라 고원군과의 면의 분리 및 통합이 자주 이루어졌다.

교통은 각 계곡을 따라 도로가 통하여 방사성 체계가 이루어지며, 이들이 만나는 북부의 대평리가 생활의 중심지이며 주민의 생활수준은 낮은 편이다. 유적으로는 산성리에 고철옹성지가 있으며,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교가 있다.

대평(大坪) · 천흥(泉興) · 덕평(德坪) · 하동산(下東山) · 중동산(中東山) · 상동산(上東山) · 자아(自牙) · 산성(山城) · 중흥(中興) · 신흥(新興) · 미로(美老) · 미자아(美自牙) · 상평(上坪) · 초평(草坪) · 하평(下坪) · 산계(山界) · 원흥(院興) 등 17개 이가 있다.

광복 후 변천

1952년 12월 덕흥면 · 고령면 · 호도면 · 인흥면 · 순령면 · 진평면의 일부 이(里)가 인흥군으로, 선흥면 · 요덕면 · 횡천면은 요덕군으로 편입되었으며, 1974년 1월 다시 인흥군이 없어지면서 영흥군으로 되었다. 그 뒤 영흥군은 1977년 3월에 금야군으로 개칭되었다. →금야군,요덕군

참고문헌

『삼국사기』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영흥군읍지』
『함경남도지』(함경남도지편찬위원회, 1968)
『북한문화재실태와 현황』(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85)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주석
주1

해안선의 굴곡이 심하고 나팔 또는 나뭇가지 모양을 이루는 방식. 우리말샘

주2

고대인이 사용하였던 무기의 하나. 구리로 만들었으며 끝을 뾰족하게 하여 상대편을 찌르도록 되어 있다. 우리말샘

주3

중국 삼국 시대에, 조조가 화북을 통일하고 죽은 후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후한의 마지막 임금인 헌제(獻帝)의 자리를 빼앗아 220년에 세운 나라. 뤄양(洛陽)에 도읍하고 세력을 키워 촉(蜀)ㆍ오(吳)를 제압하였으나, 265년 제5대 원제(元帝) 때 사마소(司馬昭)의 아들 사마염에게 망하였다. 우리말샘

주4

618년에 중국의 이연(李淵)이 수나라 공제(恭帝)의 왕위를 물려받아 세운 통일 왕조. 도읍은 장안(長安)이며,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문화가 크게 융성하였으나, 안사(安史)의 난 이후 쇠퇴하여 907년에 주전충(朱全忠)에게 망하였다. 우리말샘

주5

적을 막으려고 성 밖에 임시로 만든 소규모의 요새(要塞). 우리말샘

주6

지금의 북청

주7

조선 시대에 둔 팔도의 하나. 태종 16년(1416)에 영길도를 고친 것인데, 성종 1년(1470)에 영안도(永安道)로 고쳤다가 중종 4년(1509)에 다시 함경도로 고쳤다. 우리말샘

주8

제사 때에 축문을 읽는 사람. 우리말샘

주9

천지신명에게 고하여 빎. 우리말샘

주10

마을 사람들이 마을을 지켜 주는 신인 동신(洞神)에게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 마을 사람들의 무병과 풍년을 빌며 정월 대보름날에 서낭당, 산신당, 당산(堂山) 따위에서 지낸다. 우리말샘

주11

제사 때에 읽어 신명(神明)께 고하는 글. 우리말샘

주12

삿자리

주13

물가나 물 밑의 모래 또는 자갈 속에 섞인 금. 금광석이 풍화나 침식으로 잘게 부서져서 생기는데, 보통 작은 알갱이나 비늘 모양이지만 가끔 큰 덩어리를 이룬 것도 있다. 우리말샘

주14

제사를 지내고 난 뒤 제사에 쓴 음식을 나누어 먹음. 우리말샘

주15

비가 때맞추어 알맞게 내리고 바람이 고르게 분다는 뜻으로, 농사에 알맞게 기후가 순조로움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16

종유굴 안의 천장에 있는 종유석에서 떨어진 탄산 칼슘의 용액이 물과 이산화 탄소의 증발로 굳어 죽순(竹筍) 모양으로 이루어진 돌 기물. 우리말샘

주17

논을 새로 만듦. 또는 그 논. 우리말샘

집필자
노도양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