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은 낭림산맥에 의하여 평안남도 양덕군과 경계를 이루고, 남쪽은 문천군, 북쪽은 영흥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6°42′∼127°21′, 북위 39°12∼39°30′에 위치하며, 면적 961㎢, 인구 약 6만 2000명(1937년 현재)이다. 1개 읍 5개 면 104개 이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고원읍 조양리이다.
지세는 서부 도계에 낭림산맥의 남단이 남북으로 뻗어, 백산(白山, 1,452m)·운령(雲嶺, 775m)·재령산(載靈山, 1,208m) 등의 높은 산과 고개가 솟았고, 그 여맥들이 다시 동쪽으로 뻗어 동해안에 이르러 급경사를 이룬다.
북부의 여러 산맥 사이의 지류가 모여 동쪽으로 흐르는 수동강(水洞江)은 도중에서 덕지강(德池江)에 합류하여 영흥만으로 들어간다. 남쪽에는 문천군과의 경계를 흐르는 전탄강(箭灘江)이 있고, 하류에 이 군의 주요 생산 지대인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되었다.
이 군은 대부분이 내륙 지방에 위치한 만큼,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나타내어 한서의 차가 심하다. 그러나 북서 계절풍의 영향으로 푄 현상이 나타나 겨울철에 같은 위도의 평안도 지방보다 따뜻하고, 여름철에도 의외로 고온을 이루는 때가 있다.
연평균 기온 10℃, 1월 평균 기온 ·4.1℃, 8월 평균 기온 24.3℃, 연 강수량 1,186㎜이며, 대체로 첫서리는 10월 16일경에 내리고 마지막 서리는 5월 6일경에 내린다.
[고 대]
구석기 시대는 물론 신석기 시대·청동기 시대·초기 철기 시대의 유물·유적도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인접한 영흥군 영흥읍 소라리, 금야읍 연동리·용흥리·용산리에서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많이 나오고, 또 영흥군 용산리에서 초기철기 시대의 유물·유적이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청동기 시대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역사 시대에 들어와 일찍이 남옥저에 속하여 있다가 고구려가 흥기함에 따라 56년(태조왕 4)고구려 영토로 편입되었다. 고구려 때 덕녕진(德寧鎭)을 두고, 부변을 진수(鎭守)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나 상고할 만한 자료는 없다.
244년(동천왕 18) 위나라 장수 관구검(毌丘儉)의 침공으로 국내성이 함락되고 위나라 군사가 계속 추격해 오자, 동천왕은 강계·장진·황초령을 지나 멀리 동해안의 남옥저 방면 매구(賣溝:지금의 함경남도 문천)로 피란하였으므로, 이때 이 군은 전란의 피해를 입었을 것 같다. 왕은 다시 북옥저를 거쳐 국내성으로 돌아갔다가 평양성[東黃城:지금의 평안북도 강계]에 천도하여 복구에 힘썼다.
삼국이 정립하여 쟁패를 거듭하고 있을 때, 신라는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북경 개척에 힘써 그 세력이 함경남도에까지 미쳤다.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의 하나인 황초령비(黃草嶺碑)는 지금의 함주군 하기천면 진흥리에 세우고, 또 마운령비(摩雲嶺碑)는 이원군 동면 사동에 있는 마운령에 세웠던 것으로 보아 신라의 세력이 지금의 함주군·이원군에까지 미쳤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때고원군은 신라 영토에 편입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 통일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건국한 발해가 남쪽은 평안도와 함경도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지금의 영흥 부근에서 신라와 접경하고 있었으므로, 당시 고원군은 신라의 영토에 편입되어 있었을 것 같다.
발해 시대에 남경, 즉 지금의 북청군 부근에 내려와서 살고 있던 여진족(女眞族)은 점점 더 남하하여 영흥·안변 부근에까지 와서 살면서 변경을 노략질하는 일이 많았다.
[고 려]
태조는 개국 후 곧 동북경 방면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920년(태조 3)유금필(庾黔弼)을 골암성(鶻巖城)에 파견하여 북번(北蕃)을 회유 혹은 토벌함으로써, 안변·영흥 방면이 다시 고려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그리하여 969년(광종 20) 장평진(長平鎭:지금의 영흥)을 설치하고, 4년 뒤 화주(和州:지금의 영흥)·장평진과 박평진(博平鎭)·고주(高州:지금의 고원)에 각각 성을 쌓아 영흥 지방의 방어에 대비하였다.
995년(성종 14) 방어사를 두고, 1028년(현종 19) 봉화산(鳳化山) 남쪽에 성을 쌓고 주치(州治)를 옮겼다. 덕종 때 요나라와 일시 국교가 단절되자 거란과 여진의 침입에 대비한 천리장성을 축성하게 되었다. 이 성은 1033년(덕종 2)에서 1044년(정종 10)까지 12년간에 걸쳐 완성되었다. 압록강구의 위원진(威遠鎭)에서 정주(定州:지금의 定平)에 이르는 석성(石城)이다.
뒤에 여진의 완안부(完顔部) 세력이 대거 남하, 숙종 때 추장 우야소(烏雅束)가 함흥평야 일대의 여진 촌락을 공략함으로써, 이곳 여진 촌락의 통속(統屬)을 둘러싸고 고려는 우야소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처음 전세는 크게 불리하여 장성 밖의 여진 촌락을 모두 빼앗겼으나, 1107년(예종 2) 12월 윤관(尹瓘)이 기병 중심의 별무반(別武班)을 조직하여 17만 명의 대군을 동원, 수륙양면작전을 펴서 함흥평야를 점령하여 완안부를 북으로 축출하고, 점령지의 요충인 함주(함흥)를 비롯하여 영주(英州)·웅주(雄州)·길주(吉州)·복주(福州)·공험진(公嶮鎭)·통태진(通泰鎭)·숭녕진(崇寧鎭)·진양진(晉陽鎭)에 9성을 구축하고 남방의 주민들을 옮겨 살게 하였다.
그러나 9성은 그 뒤 우야소의 반격으로 길주와 공험진의 함락에 따른 전세의 불리와 우야소의 화평제의 및 윤관에 대한 조신의 시기 등이 작용하여, 2년 뒤에는 9성을 반환하고 함흥 이북의 땅은 다시 완안부 여진의 손에 넘겨주었다.
1258년(고종 45) 11월 조휘(趙暉)·탁청(卓靑) 등이 동북면병마사 신집평(愼執平)을 살해하고 화주 이북의 땅을 가지고 몽고에 항복하였다. 몽고는 이곳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여 근 100년간 통치하였는데, 이때 고원군도 몽고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356년(공민왕 5)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써서 화주를 수복하여 쌍성총관부를 혁파하고, 그곳에 화주목(和州牧)을 설치하였으며, 이어서 삼철(三撤:지금의 북청)을 점령하고,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복주·길주 등지로 북진의 노력을 계속하였다.
따라서, 함경남도가 거의 수복되어 이 군에도 군·현을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이와 같은 수복에 따라 종전의 고주방어사(高州防禦使)가 지고주사(知高州事)로 승격하게 되었다.
[조 선]
1413년(태종 13) 10월 ‘주(州)’자 붙은 군현의 명칭을 모두 ‘산(山)’·‘천(川)’자로 고칠 때 이곳은 이례적으로 ‘원(原)’자로 고쳐 고원으로 하였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은 한 달도 못 되어 서울을 점령하고 가토(加藤淸正)가 함경도로 침공하여 왔다. 삽시간에 화주·함흥·단천·길주·경성·회령 등지를 점령당하고,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 두 왕자가 포로로 잡히기도 하였다. 이때, 이 군도 왜군에게 막심한 전화를 입었다. 병자호란 때는 청군의 일부인 몽고병이 함경도를 거쳐 돌아갔기 때문에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근 대]
1895년 5월 지방관제를 개혁하여 종래의 도·목·부·군·현제를 폐지하고 대신 부·군제를 두어 전국에 23부 334군을 설치하여 부에는 관찰사, 군에는 군수를 두었는데, 고원은 군으로서 함흥부에 속하였다. 1896년 행정제도를 다시 개편, 13도 1목 15부 337군으로 하였다. 이때함경도를 남·북 2도로 나누고, 고원군은 함경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의 변경으로 상발산사(上鉢山社)와 신산사(薪山社)를 합하여 산상면으로 개칭하고, 영흥군 운흥면을 편입, 고원읍·군내면·산상면·수동면·산곡면·운곡면으로 개편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이 군에서는 3월 13일에 격렬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 의하면, 집회 횟수 4회, 집회인 수 1만 5000명, 사망자 48명, 부상자 150명, 투옥자 252명이었다고 한다.
군내면 조양리봉황산록에는 석기 시대 유물 산포지가 있다. 산곡면 성남리에는 지름 6∼15m, 높이 2∼4m에 이르는 고려 고분 3기가 있다. 수동면 미둔리, 산곡면 성남리·하경둔리 등의 산정에는 타원형으로 축성한 석축의 산성들이 있다.
성남리에 있는 마고산성(麻姑山城)은 높이 2m, 너비 3m, 주위 540m의 타원형 석성으로서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는 성곽이며, 산곡면 고관리·신흥리, 군내면 하고읍리 등지에는 산정에 여러 개의 봉수터가 남아 있다.
신흥리대연대봉(大烟臺峯) 정상에는 평안남도 소재의 기린령봉수(麒麟嶺烽燧)와 진운령봉수(晉雲嶺烽燧)와 연결되는 대연대 봉수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으며, 군내면 하고읍리웅망산 산정에는 높이 2m, 너비 3m, 주위 30m의 원형으로 된 토석축의 웅망산봉수지가 있다.
그 밖에 봉현봉수와 수동면 용산리고분, 산곡면 사동사지 등의 유적들이 분포되어 있다. 불교 사찰로는 상산면의 양천사(梁泉寺)·대수사(大垂寺)를 비롯한 수동면의 고찰이 있다. 양천사는 753년(경덕왕 12)에 창건된 사찰이나 1677년(숙종 3) 다시 중건하였다. 산곡면 수산리에서 성암리에 걸쳐 축성된 성암리성이 있다.
산곡면 하경둔리에 있는 애수진(隘守鎭)은 983년(성종 2)에 축성하였으며, 동서 길이 약 150m, 남북 길이 약 300m, 높이 6m, 둘레 약 800m나 되는 성지로서, 사방에 성문지를 뚜렷이 가지고 있는 진보(鎭堡)이다. 산곡면 화남리 사동에는 백자를 굽던 요지가 있다.
옛 교육기관으로는 향교가 처음에 군 동쪽 2리에 있다가 서쪽 1리쯤으로 옮기고, 관원으로는 군수 1인과 훈도 1인이 있었다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으며, 서당에서 기초 교육을 받은 청소년이 교육을 받았다. 개화기 이후에 이 지방 청소년들은 주로 원산에 나가 공부하였다.
근대식 교육기관은 1904년 직산군수(稷山郡守)를 역임한 김용수(金容水)가 “신문화를 흡수하여 인재를 양성함이 시급한 일”이라 역설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상산면 주당리에 세운 협성학교(協成學校)가 최초의 것이었다. 협성학교는 선각자적 인재를 많이 배출하였으나 1911년 일제의 압력으로 폐교되었다.
일제의 1면1교 정책에 의하여 공립보통학교가 각 면에 생겼고, 광복 당시 국민학교는 6개교였다. 사립학교로는 전 향교 자리에 중학 과정의 명륜학원(明倫學院)이 있었다.
종교로는 고찰인 양천사와 사명당(四溟堂)이 공부하던 각원암(覺圓庵) 등 3개의 사찰이 있어 불교 신자가 비교적 많은 편이다. 1933년의 조사에 의하면 불교는 교파 2종, 포교자 5명, 신도 1,329명이었고, 기독교는 교파 1종에 포교자 7명, 신도는 124명이었다.
이 고장은 평안도·함경도·강원도의 3도 특색이 드러나는 길목에 있어서 그러한 특성을 말해 주는 설화가 많다. 대표적인 몇 가지를 들면 〈부래산설화〉·〈허씨몰락전설〉·〈마고할미성전설〉·〈신당연전설〉 등이 있다.
〈부래산설화〉는 부래산이 원래 평안남도 양덕의 산인데, 고원 쪽으로 날아와서 명산이 되고, 산이 높고 수려해서 유람객이 많으므로 양덕군수가 자기네 산이라며 옛날부터 산세(山稅)를 받아 갔다는 것이다.
그 뒤 고원군에 명군수가 와서 다른 군에 산세 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고는 양덕군수에게 부래산 때문에 넓던 평야가 자리를 뺏겨 농사에 지장이 많으니 빨리 옮겨 가라고 해서, 그때부터 세금 내는 것이 중단되었다는 내용이다.
〈허씨몰락전설〉은 부래산 북쪽에 야광석(夜光石)이 많이 노출되어 5리 밖에서도 번쩍번쩍하여 불야성을 이루므로, 읍의 수령들이 매일 밤 놀이 오는 바람에 그 산 밑에 사는 허씨네는 밤마다 잔치하느라 볼일을 보지 못하는 형편이라, 허씨 손자가 그 야광석을 묻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 허씨 일가는 몰락하였다는 전설이다.
〈마고할미성(일명 隘守鎭)전설〉은 고려 때 거란 군사가 쳐들어왔을 때, 이 성의 장수 강민첨(姜民瞻)이 마고할미의 도움으로 적병을 물리쳤다는 이야기이다.
신당연(神堂淵)에 얽힌 전설은 군 북쪽에 덕지탄(德池灘, 일명 신당연)이 있는데, 성황신이 늘 이 못에 빠져 호랑이를 불러 모았기 때문에 호랑이 피해가 많더니, 단오에 무당과 기생들이 이 못가에 모여 금고(金鼓)로 인도하면서 가무를 한 풍습이 생긴 뒤부터는 호환이 없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이 밖에 지하에서 물이 솟아오르고 기우제를 지내면 꼭 비가 온다는 〈용교동굴설화 龍窖洞窟說話〉도 있다.
이 고장의 민요는 함경남도의 삼거리 격인 고장이라 이합집산이 많고, 특히 경기·강원·평안·함경의 각 도 사람들이 머물렀다 가는 곳이라 애환의 곡절이 또한 무상하다.
“서쪽이라 양덕 길은 높기도 한데/날 두고 임 가신 아득한 길/그 많던 버들가지 다 훑도록/아가씨 눈물은 달 밑에 지네.” 머물렀다 가는 사람이 꼭 정들여 놓고 가는 법인 양 모였다 헤어진 뒷자리에는 아가씨들의 기다림과 눈물만 남았던 고원으로 민요는 전해진다.
같은 〈어랑타령〉을 불러도 그 가사가 “저 들판에 송아지는 시금질만 하는데/이내 가슴 썩는 속은 방망이질만 하누나/어랑어랑 어허랑/어루람마 디허라/이것도 내 사랑이로구나.”라고 불렀다.
그런데, 들이 기름져 곡창이면서 버들이나 송아지를 소재로 한 것은 아마 “연기 낀 들판에 버들 금실 나부끼고/몇 번이나 훑어서 정든 사람 주었던가/숲 밖에선 우는 매미 손님 한을 알았는지/맑은 소리 길게 뿜고 석양 가지에 오르네(烟楊寄地拂金絲 幾被情人贈別離 林外一蟬諧客恨 曳聲來上夕陽枝).”라고 한 김극기(金克己)의 고원을 읊은 시와 박원형(朴元亨)의 시의 “백성들은 바지가 다섯 벌이나 되고/곡창에는 9년이나 쌀이 묵었구나/성인의 덕이 점차 동쪽으로 뻗으니/남쪽 들판엔 누운 송아지도 많구나(蒼生五袴歌 紅腐九年粟 聖化自東漸 南郊多臥犢).”에서 버들가지 훑어서 서러운 님 보내며 들판에 평화로운 송아지와는 대조적으로 임 기다리는 번민을 노래한 듯하다.
고원 지방은 단오 명절을 성대하게 지내는 풍속이 있어 〈단오요〉가 널리 유행되는데 1절만 소개하면, “요문갑사 도홍치마/자락 들어 꽃을 매고/초록 적삼 만호장에/자색 고름도 너울너울/후여넝층 버들가지/저 가지를 툭툭 차자.” 이는 안변 지방이나 문천 지방과도 비슷하다.
한편, 고원 지방에는 아이들이 노는 동요로 ‘한알똥 두알똥’놀이와 함께 노래가 있는데, 아이들이 다리를 쭉 뻗고 마주앉아 다리는 사이사이에 끼우고, 이 노래를 부르면서 끝마디에 닿는 다리를 당겨 세우고 끝까지 남는 다리 임자가 벌로서 노래하거나 술래가 되는데, 그 노래 가사의 “한알똥! 두알똥! 세알똥! 네알똥! 장군아! 멍군아! 고드래! 땡”에서 걸리면 다리를 당긴다. 또, 〈개똥벌레요〉도 많이 부르는 동요 가운데 하나였다.
민속놀이는 다른 지역에서 설과 추석에 놀이를 하는 데 비하여 단오놀이를 가장 크게 지냈다. 이날은 온 마을이 하루 종일 실컷 마시고 논다.
특히, 왕래(往來) 돈 주기(일종의 용돈 주기)가 성행하는데, 머슴들은 각기 주인이 주는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일년 농사에 정성을 얼마나 쏟을까를 가늠하였다 한다.
동제는 단오절 못지않게 흥청거리는 축제가 된다. 제신은 어느 고을보다 많아서 산천존신(山川尊神)·성황신(城隍神)·여역존신(厲疫尊神)·시기존신(時氣尊神) 등을 제사 지내는 산천제와 기향제·여제 등을 지낸다.
그 가운데 산천제는 동네에서 소제로 지내고, 산신제는 각 집에서 새벽에 심산이나 유곡에 찾아가 정화수로 흰 쌀밥을 지어 놓고, 흰산채(무채)를 곁들여 기도, 축원한다.
가장 큰 동제는 기향제인데, 산천신·여역신·성황신·시기존신 등을 함께 모시는 제사로서, 동네마다 여제계(厲祭契)를 모아 두었다가 봄·가을 두 번에 걸쳐 행한다. 초헌관·아헌관·종헌관이 분향, 헌작, 재배하며, 제단은 평지나 강변, 또는 교외에 가설하여 놓고 일몰 후에 지낸다.
제사 음식은 각 집에서 정성껏 차려 오고, 동네에서는 공동으로 마련되어 있는 비용으로 소나 돼지를 잡아서 그 국과 고기를 각 집에 분배, 진설하고는 제사 지내는데, 이때 축문을 고하되 그 축문 이름을 ‘육제축(肉祭祝)’이라 하였다. 육류의 분량은 비교적 많은 편이며, 더 필요한 집은 출자를 더 하는 풍습도 있다.
제사 지낸 뒤에는 제사 음식을 각 가정에 가지고 와서 가족과 친족을 초대하여 회식하며 즐긴다. 연중 육식하는 기회가 드문 이 고장에서는 유일한 손님 접대의 기회로 삼기도 하였다.
고원읍을 중심으로 하는 동부 평야는 비교적 토지가 기름지고, 관개시설도 잘되어 있어 좋은 쌀을 생산한다. 그러나 그 밖의 지역은 대체로 산지가 많아, 밭농사가 주가 되어 조·콩·밀·수수·감자·깨 등을 산출한다.
지하자원은 질이 좋은 무연탄을 비롯하여 금·은·동·연 등의 매장량이 많고, 금광과 무연탄광은 함경남도에서 손꼽힌다. 고원탄전이 수동면 성내리를 중심으로 하는 산악 지대에 있고, 그 매장량은 1억 톤 이상으로 추정된다.
특산물로는 수동면 미둔리에서 돌로마이트가 산출되고, 덕지강·전탄강에서는 연어가 잡힌다. 상산면 회동리에 있는 연어 인공 부화장에서는 해마다 300만∼500만 개의 어란을 채란하여 부화시키고, 200만∼300만 마리씩 덕지강 지류인 계류에 방류하여 바다에서 성장하도록 하였다. 1917년 이후부터는 인공 부화된 연어가 덕지강과 용흥강에 올라와 산란하여, 연어 번식은 해마다 늘어 어획고를 높였다.
상업 활동은 주로 공설 정기 시장을 이용하고 있다. 농산물의 집산지이고 가축이 많아 상품 교역과 사교 활동이 활발하다.
정기 시장으로 고원장이 고원읍 관덕천에서 3일과 8일에, 지경장이 상산면 지경리에서 2일과 12일에, 덕지장이 군내면 상석연리에서 1일과 10일에 열리며, 그 밖에도 산곡면 수산리의 산곡장이 있다. 특히, 고원장은 평안남도 양덕과 강원도 고성에서 오는 행상이 많아 상거래가 가장 활발한 편이다.
군의 동단을 남북으로 함경선이 통하며, 전탄·고원·현흥(玄興)의 3역이 있고, 고원역에서 평원선이 분기되며, 부래산(浮來山)·미둔(彌屯)·인흥(仁興)·관평(館坪)·운흥(雲興) 등의 역이 있다. 국도는 대체로 철도와 나란히 되어 있어서 고원읍은 철도·도로 교통의 요지가 된다.
[고원읍 高原邑]
군의 동부에 있는 읍. 면적 38.45㎢, 인구 1만 4746명(1943년 현재). 읍 소재지는 관덕리이다. 본래 995년 고주(高州)라고 하고, 1024년 현재의 고원읍 지역에 방어사를 옮기고 고원이라 개칭하였다. 그 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하발면(下鉢面)이 되었으나 1937년고원면으로 변경하였고, 1943년 읍으로 승격하였다.
서부의 읍 경계에 삼봉산(三峰山)·정성봉(貞聖峰) 등의 산이 있고, 나머지는 평야 지대여서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지형을 이룬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수수 등이고, 농우 육 등 축산업과 교통의 요지로서 운수업·상업이 발달하였다.
남북으로 원산·회령 국도가 종단하고 있고, 1924년 함경선이 개통되고, 1931년 평원선이 양덕까지 개통되었고, 1936년 원산까지 완공되어 교통의 요지로서 발전하였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관덕(觀德)·도정(都井)·신성(新盛)·창항(倉項)·조양(朝陽)·동산(銅山)·신정(新井)·진사(進沙)·남흥(南興)·합탄(蛤灘)·문조(文潮)·광탄(廣灘)·호평(湖坪)·흥평(興坪)·매평(梅坪)·하고도(下高島)·상고도(上高島)·덕흥(德興)·보충(寶忠)·동양(東陽)·대수곡(大水谷)·남양(南陽)·금수(今水) 등 23개 이가 있다.
[군내면 郡內面]
군의 동북단에 있는 면. 면적 62.60㎢, 인구 6,875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상석연리이다. 995년 고주라 하여 방어사를 두고 북변 일대를 지키던 곳이며, 그 뒤 변천을 거듭하여 군 소재지가 고원읍으로 옮겨졌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군내면으로 되었다.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으며, 덕지강의 하류가 남쪽 경계를 지나서 동류한다. 동서 간의 길이가 긴 장방형의 지형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수수·팥·채소 등이며, 과수 재배와 누에치기도 활발하고, 덕지강의 여름철 연어잡이가 유명하다. 함경선과 국도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나란히 관통하고 현흥역이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이천 서씨(利川徐氏)가 상사천리, 연일 정씨(延日鄭氏)가 현흥리, 한양 조씨(漢陽趙氏)가 중사박리에 동족 마을을 이루어 거주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2개교가 있다.
상석연(上石淵)·몽상(夢尙)·송천(松川)·도청(道淸)·하석연(下石淵)·황송(黃松)·중석연(中石淵)·중사박(中沙泊)·현흥(玄興)·신흥(新興)·하가남(下加南)·가하(加下)·금창(今昌)·가동산(加東山)·상가남(上加南)·신안(新安)·신창(新昌)·천동(泉洞)·상사창(上泗昌)·하사창(下泗昌)·다삼포(多三浦)·하고읍(下古邑) 등 22개 이가 있다.
[산곡면 山谷面]
군의 최남단에 있는 면. 면적 301.68㎢, 인구 1만 4679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수산리이다. 조선시대에는 산곡사(山谷社)라고 하였으나 조선 말기에 산곡면으로 개칭하였다.
동·서·남 3면의 경계에 재령산·비우봉(飛雨峰, 1,139m)·팔봉산(八峰山, 1,054m) 등이 있으며, 북쪽으로 좁은 계곡이 있다. 면내에서 발원한 계류가 중앙 지대를 북류하여 덕지강의 상류를 이루고, 수동면의 서부에서 동류한 지류와 면의 북단에서 합류하여 수동면으로 흐른다. 대부분이 산간지대이며 농경지는 협소하다.
1927년 산곡수리공사로 관개·배수·방수사업이 실시되었고, 주요 농산물은 쌀·조·호마(胡麻)이며, 목재도 생산되고 있다. 죽전리에는 금광이 있으며, 각처에 많은 석회석이 매장되어 관련 산업이 있어 발달하였다. 교통 시설로는 국도가 동서로 통과하고 있다.
전주 김씨(全州金氏)의 동족 마을이 화남리에 있으며, 애수진고성지(隘守鎭古城址 : 일명 古德寧鎭城址 또는 마고할미성이라고 하는데, 고려의 장군 姜民瞻이 거란과 싸운 戰勝地라고도 한다.)가 성남리에 있다. 원거리에 고려 시대 고찰인 각원암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수산(秀山)·원거(院巨)·상경둔(上景屯)·하경둔(下景屯)·덕산(德山)·영암(靈巖)·건천(乾川)·고관(高串)·성남(城南)·신흥(新興)·와우(瓦宇)·화남(花南)·수(修)·상죽전(上竹田)·회동(檜洞)·하죽전(下竹田) 등 16개 이가 있다.
[상산면 上山面]
군의 동남단에 있는 면. 면적 82.90㎞, 인구 9,194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붕현리이다. 973년(광종 24) 변방 지방 수호를 위하여 홍원군(洪原郡)을 두고 그 소재지로 삼았으며, 995년 명칭을 고주라 개칭하고 방어사를 두었다.
1024년 명칭을 고원으로 개칭하고, 방어사를 고원읍(현재의 지명)으로 옮겼다. 뒤에 명칭이 신산사로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상발산사를 통합함과 동시에 명칭을 상산면이라 하였다.
서북쪽은 경계선이 능선으로 이어졌고, 동남쪽은 전탄강 하류가 경계선을 거쳐서 남류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보리·팥·옥수수 등이며, 과수 재배와 누에치기도 성하다. 전탄강에서는 7, 8월의 산란기에 연어잡이가 유명하다.
1912년 회동리에 해준인공부화장(鮭鱒人工孵化場)을 설립하여 연어·송어 등의 어란을 연간 수백만 마리씩 인공 부화하여 방류하는데, 성과가 좋고 관광객도 많다. 또한, 금·은·동·납·석탄 등의 매장량이 많다.
함경선과 국도가 동부 지역을 남북으로 관통하고 전탄역이 있으며, 동서로도 국도가 관통하여 교통이 편리하다. 신라 때의 고찰인 양천사가 있고, 평안도에서 왔다는 전설이 있는 부래산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붕현(鵬峴)·석교(石橋)·원봉(元峰)·신당(新塘)·복흥(福興)·지경(地境)·내동(內洞)·봉현(鳳峴)·입석(立石)·방축(防築)·풍남(豊南)·도내(島內)·교초(交草)·용흥(龍興)·주당(珠塘)·회목(會睦)·용봉(龍峰)·신흥(新興)·북방축(北防築)·장흥(長興)·낙천(樂泉)·용천(龍泉)·하상(河上)·하다(河多)·독암(獨巖)·회동(會洞)·도흥(都興)·은하(銀河)·송현(松峴) 등의 29개 이가 있다.
[수동면 水洞面]
군의 북부 끝에 있는 면. 면적 227.80㎢, 인구 9,648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인흥리이다. 원래 수동사(水洞社)라고 하였으나 조선 말기에 수동면이라 개칭하였다.
서·남·북 3면의 경계선 상에 비우봉·적봉(赤峰, 858m)·오봉산(五峯山, 1,239m) 등의 높은 산줄기가 이어져 있으며, 동쪽에 좁은 골이 틔어 있다. 덕지강이 계곡을 흐른다. 대부분이 산악 지대이므로 농경지가 협소하다.
주요 농산물은 수수·조·콩·호마 등이다. 또, 무연탄·금·은·동·납 등의 광산물 생산도 많다. 성내리를 중심으로 한 무연탄광은 도내 굴지의 규모로서 매장량이 1억 1000만 톤이다. 매장량 3억 톤 규모의 돌로마이트광이 1940년 미둔리에서 발견되었다. 덕지강은 여름철의 연어잡이가 유명하다.
평원선이 면의 중앙을 따라 동서로 관통하고 미둔역·축전역·인흥역·성내역·천성역 등이 있으며, 국도가 이와 나란히 통과하고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전주 김씨의 동족 마을이 인흥리에 있다. 유운령 아래에 있는 용교동은 암굴에서 용솟음치는 물이 피부질환 등에 약효가 있다고 하여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인흥(仁興)·미둔(彌屯)·용산(龍山)·계남(溪南)·축전(杻田)·성내(城內)·적가슬(笛歌瑟)·천성(泉城)·장량(莊糧) 등 9개 이가 있다.
[운곡면 雲谷面]
군의 서부에 있는 면. 면적은 247.74㎢, 인구 1만 3850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용평리이다. 조선 시대에는 운곡사(雲谷社)라 하여 영흥군에 속하였으며, 조선말 운곡면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5개 이를 분리하여 고원군 운곡면으로 개편하였다.
동·서·남 3면의 경계선에는 백산·백두산(白頭山, 1,370m)·평산덕산(平山德山, 1,159m)·연산(燕山, 1,242m)·적봉(赤峰) 등의 산이 있으며, 북쪽에 좁은 골이 있다.
면내에서 발원한 계류가 계곡을 따라 면의 중앙 지대를 북류하여 용흥강(龍興江)의 상류를 이루고, 면의 북단에서 영흥군의 횡천면으로 흘러 들어간다. 대부분이 산간지대이며, 농경지는 극히 협소하다.
주요 농산물은 조·메밀·호마이며, 목재와 장작·숯 등도 생산되고 석회석의 매장량이 많아 관련 산업이 성하다. 평원선이 남북으로 관통하고 관평역·운곡역·천을역이 있으며, 국도가 동서로 통과하고 있어 교통은 매우 편리하다.
경주 김씨(慶州金氏)가 천을리, 순흥 안씨(順興安氏)가 관평리, 남원 양씨(南原楊氏)가 용평리에 각각 동족 마을을 이루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용평(龍坪)·운흥(雲興)·천을(天乙)·태을(太乙)·관평(館坪) 등 5개 이가 있다.
1952년 12월 고원면·상산면·군내면 전체와 수동면의 3개 이, 강원도 문천군의 명구면 구부안리 일부, 천내면 제위리·용산리 일부 지역이 합쳐져 고원군이 신설되었고, 운곡면·산곡면 전체와 수동면 일부가 수동군으로 이관되었다.
1974년 1월수동군이 고원군에 편입되었고, 5월 풍남리·전탄리·원봉리가 분리되어 강원도 천내군으로 이관되었다가 1981년 8월 다시 귀속되었다.
현재 함경남도 남부에 있으며, 동쪽은 금야군, 서쪽은 평안남도 신양군과 양덕군, 남쪽은 강원도 천내군과 평안남도 양덕군, 북쪽은 요덕군·금야군과 접하여 있다. 동경 126°42′∼127°21′, 북위 39°12′∼39°37′에 위치하며, 면적 약 1,107㎢, 인구 18만 1000여명(199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은 고원읍과 부래산(浮來山)·수동(水洞)·장동(長洞)·산곡(山谷)·운곡(雲谷)·팔흥(八興)·원거(院巨)·덕사 등 8개노동자구, 상산(上山)·낙천(樂泉)·남흥(南興)·중평(中坪)·문하(文下)·하평(下坪)·송천(松川)·황송(黃松)·군내(郡內)·신창(新昌)·단천(端川)·미둔(彌屯)·덕지·수산(秀山)·성남(城南)·죽전(竹田)·운흥(雲興)·천을(天乙)·용평(龍坪)·운산(雲山)·관평(館坪)·천성(泉城)·장량(莊糧)·성내(城內)·축전(杻田)·삼평(三坪)·회평(檜坪)·풍남(豊南)·전탄(箭灘)·원봉(元峰)·송흥(松興) 등 31개 이로 되어 있다. 군 소재지는 고원읍이다.
지형은 서부 지역이 높고 동부로 갈수록 낮아진다. 서부에는 백산(1,449m)·재령산(1,217m)·제비산(1,240m)을 비롯하여 1,000m 이상의 산들이 솟아 있고, 동부 지역에는 충적지평야와 야산들이 있다. 군내에는 수동천·창리천 등의 지류와 합류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덕지강과 서부 지역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용흥강의 지류들이 있다.
기반암은 주로 고생대 석회암과 고회암으로 되어 있고, 점판암·사암·역암·화강암도 있다. 토양은 주로 갈색산림토가 퍼져 있으며, 하천 연안에는 충적토와 논토양이 분포되어 있다.
기후는 연평균 기온 10℃, 1월 평균 기온 -5.8∼-7.4℃, 8월 평균 기온 22∼25℃, 연평균 강우량은 1,250㎜로서 많은 편이다. 산림은 군 전체 면적의 약 80%로서 소나무 단순림과 소나무·참나무를 주로 하는 혼성림으로 되어 있다. 그 밖에 감나무·호두나무·고욤나무·동백나무·산뽕나무·초비나무와 산채, 약재도 많다.
농경지는 군 넓이의 약 20%이며, 그중 논이 46.6%, 밭 44.8%, 과수원 6.6%, 뽕밭은 약 2%를 차지한다. 주요 작물은 쌀·옥수수·콩이고, 그 밖에 밀·담배·깨·청마를 많이 심는다.
낙천·군내·신창·금수 지역에서는 사과·배·복숭아·감이 많이 생산되고, 서부 지역 뽕나무 밭에서는 누에고치가 많이 난다. 또한, 양·토끼·소·염소 등의 초식 가축과 돼지·닭 등이 사육되고 있다.
이 지역에는 무연탄과 석회석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으며, 고원탄광·운곡탄광에서는 무연탄이 채굴되고, 부래광산에서는 석회석을 채굴, 생산되고 있다. 이 석회석을 원료로 대규모 부래산시멘트공장이 건설되었다. 그 밖에 식료품·직물·제지·일용품 등을 생산하는 소규모 지방 공장이 있으며, 여기에서 생산되는 양말·단추·초물제품·가죽제품은 외국에 수출한다.
교통망으로는 평라선(평양∼나진) 철도가 지나며, 고원역에서 강원선(고원∼원산∼고산)과 갈라진다. 평라선 둔전역에서 수동을 거쳐 장동 간에는 고원 탄광선이 있다. 금야·천내·문천·평안남도 양덕 등의 인접 시·군과 통하는 도로가 있다.
이 군에는 부래산(浮來山) 전설이 전하고 있다. 고원읍 서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에 평안남도에서 부래하였다 하여 이에 얽힌 설화와 야광석에 얽힌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신당연(神堂淵)에 관한 설화도 전한다.
명승지로는 구룡연(九龍淵)·대승사(大乘寺)·신당연 등이 있으며, 유적으로는 상산리 부래산 아래에 신라 시대의 고찰인 양천사(梁泉寺)와 원지노동자구에 고려 시대의 고찰인 각원암(覺圓庵)이 있다.
마고할미성(麻姑할미城)은 이병(梨柄) 또는 덕령진(德嶺鎭)이라고도 하며, 그 밖에 성남리에는 석축 성터가 남아 있고, 수동리에 애수진(隘守鎭)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석탄고등중학교·고등농업학교 등이 있으며, 도서관·영화관·문화회관·고원체육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