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 ()

민속·인류
개념
민간에 내려오는 생활 문화를 대상화한 민속학의 주요 개념.
이칭
이칭
풍속학, 민정학(民情學), 민인학(民人學), 민학(民學)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민속은 민간에 내려오는 생활 문화를 대상화한 민속학의 주요 개념이다. 본디 이것은 한자 문화권에서 사용되어 온 말로 그 민정풍속(民情風俗)의 원의는 동아시아의 근대에도 존재한다. 그런데 20세기 초를 전후하여 서구의 포클로어, 폴크스쿤데라는 개념이 일본에 전해졌고, 그 번역어로 ‘민속 · 민속학’이 정착되며 종래의 민속에 의미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그리고 1920년대 중반에 민속학이란 근대 학문과 함께 식민지 조선에 들어온 민속의 개념이 이후의 정치 사회 변동, 민속학 연구의 전개와 연동하며 새로운 의미를 형성해 왔다.

정의
민간에 내려오는 생활 문화를 대상화한 민속학의 주요 개념.
한자문화권의 ‘민속≒풍속’

영국의 포클로어(Folklore)와 독일어권의 폴크스쿤데(Volkskunde)라는 개념이 동아시아로 들어오기 이전에 한중일의 한자 문화권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민속과 풍속이 비슷한 뜻으로 병용되어 왔다. 이 중 사용 빈도가 잦은 것은 후자인데, 『시경』을 비롯한 중국 고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용례를 정리한 성과가 장량차이[張亮采]의 『중국풍속사』(1911)이다. 이 책에 따르면 풍속은 일반적으로 특정 지역의 민생과 인정세태, 즉 일정 토지마다 존재하는 생활 형편이나 습속, 관행, 그리고 당지에서 삶을 꾸리는 생활자들의 성품이나 기질, 인정 등을 의미한다. 또 풍(風)은 상층의 교화, 속(俗)은 하층이 그것을 배워 행함을 뜻하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이풍역속(移風易俗)’이 좋은 보기이다. 이 밖에 어떤 지역의 시가를 의미하거나 몸가짐, 복장과 관련한 용례도 보인다.

『한비자』나 『관자』, 『사기』, 『한서』 등에 보이는 민속의 용례는 풍속의 경우보다 훨씬 적으나 의미상으로 큰 차이는 없다. 그것은 백성들의 생활 형편이나 인정세태 등을 뜻하는데 그 의미와 사용 빈도는 한일 양국 역시 중국의 경우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의 용례는 『삼국사기』의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 조에 처음 등장하며 “시년민속환강(是年民俗歡康) 시제도솔가(始製兜率歌) 차가악지시야(此歌樂之始也)”라는 대목이다. 이 “민속환강”의 ‘민속’은 당절(當節)의 인정세태나 민생, 민간을 뜻하며, 후술(後述)하는 포클로어와 폴크스쿤데의 번역어로서, 과거 잔존 문화로서의 민속과 큰 차이가 있다. 요컨대 한자 문화권에서 고래(古來)로 풍속과 함께 공용되어 온 민속은 피치자(被治者)의 민생을 비롯한 민습, 민성, 민풍, 민심, 민정, 민간 등을 포괄하는 용어였다. 다시 말해, 교화와 계몽을 비롯한 통치의 대상으로 백성을 바라보는 치자(治者)의 정치적 · 현재적 시선의 피사체이자 풍화(風化)의 실제 권력이 작동하는 실생활의 일상과 현실이 곧 민속이었다.

폴크스쿤데와 포클로어

민속학은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세계 각지에서 출현한 보편적인 현상이다. 대부분의 경우 민속학은 근대화와 그에 수반되는 이민족의 지배나 외래 문화의 범람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한다. 특히 독일어권의 폴크스쿤데를 비롯한 자본주의 후발국의 민속학은, 낭만주의적 내셔널리즘 운동과 연동하기 쉬운데, 18세기 후반 그 기본적인 프레임을 제공한 이가 독일의 사상가 헤르더(Johann Gottfried von Herder)이다. 그의 생각을 간추리면 근대화나 외래 문화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은 시골 사람들, 그 문맹의 농민들이 사용하는 구어(口語)와 그들의 구승 문예(口承文藝)에 민족이나 국가 단위의 순수하고 고유한 문화가 깃들어 있다. 그들의 생활 공동체에 전승되거나 잔존하는 오랜 관행과 습속에 민족의 정체성과 민족 문화의 본질, 원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과 상정은 19세기 초중반 그림(Grimm) 형제의 민화(民話) 수집과 그 근원 탐구의 신화학으로 심화하고 그들의 성과가 영국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영국의 포클로어는 도시 유한계급의 여가 활동이나 호사가들의 골동 취미, 부연하면 산업화도시화로 사라져 가는 옛것들에 대한, 향수 어린 관심과 흥미에서 비롯한다. 원래 그것들은 민간 고사(Popular Antiquities)나 민간 문예(Popular Literature) 등으로 불렸는데, 영국의 톰스(William J. Thoms)가 1846년에 ‘포클로어(Folk-Lore)’란 말을 새로이 만들었다. 그로부터 30여 년 후 영국 민속학회(The Folk-Lore Society)가 창립되고 이 학술 단체의 활동을 바탕으로 포클로어라는 신조어가 점차 자리를 잡아 왔다. 아울러 제국주의의 침략과 확장을 배경으로 19세기 후반 사회 진화론에 기초한 인류학이 활성화하는데, 그 진화주의 인류학이 서구 문명사회의 농민들 사이에 잔존하는 고풍스러운 습속이나 신앙, 문예 등을 주목함으로써 포클로어의 수집과 연구가 본격화된다. 참고로 영국 민속학회가 1890년에 공간한 『민속학 편람(The Handbook of Folk-Lore)』의 서론 제1절에는 다음과 같은 포클로어의 정의가 등장한다. 즉 포클로어의 자의(字義)는 민간의 지식으로, 문화 수준이 낮은 민족들 사이에서 현재 행해지거나, 혹은 개화한 민족 중 몽매한 인민들 사이에 남아 있는, 예전의 신앙, 관습, 설화, 가요, 속담 등을 두루 총괄하는 용어이다. 이러한 포클로어라는 범칭과 개념 정의가 20세기 이후 위 편람의 번역과 함께 세계 각지로 확산한다.

동아시아로의 박래와 번역

포클로어와 폴크스쿤데는 양자 모두 대상과 그것을 탐구하는 지식 분야를 동시에 일컫는 말이다.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서 그 지식 분야의 번역어로 정착한 말이 ‘민속학(民俗學)’이며 그 대상의 번역어로 자리 잡은 것이 ‘민속(民俗)’이란 용어이다. 결과적으로 민속의 개념은 민속학이라는 분과 학문의 성립 및 전개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으며, 민속의 개념사와 민속학사가 상보적으로 거론되어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서구의 포클로어와 폴크스쿤데가 동아시아로 들어온 것은 19세기 말 이후이다. 우선 포클로어부터 보면 20세기 초반까지 여러 번역어가 등장하는데, 일본에서는 민속학 이외에 속설학, 풍속학, 토속학, 전설학, 민간전승학, 이담학(里談學), 이전학(里傳學), 이전학(俚傳學), 민전학(民傳學), 고속학(古俗學), 구사학(舊辭學) 등이 산견(散見)된다. 중국의 경우는 민속학과 함께 풍속학, 민정학(民情學), 민인학(民人學), 민학(民學) 등의 번역어가 사용된다. 이와모토 미치야[岩本通彌]의 연구에 따르면, 포클로어의 번역어로서 민속학이란 한자어를 채용한 것은 영일 사전에서 유래한다. 1902년 9월에 간행된 『신역영일사전[新譯英和辭典]』(삼성당)이 초출(初出)한 이후 이 번역어가 여러 사전에 채용된다. 그리고 1910년대에 이르러 고속학이나 구사학, 속설학 등을 구축하고 점차 자리를 잡아 왔다.

한편 폴크스쿤데의 번역어로서 민속학이 최초로 채용된 것은 1912년 4월에 간행된 『신식독일사전[新式獨和辭典]』(대창서점)이다. 주목할 것은 같은 해에 창립된 일본 민속학회로 이 학술 단체에서는 이듬해에 기관지 『민속』을 창간한다. 이 학술지는 매호 권두에 「본지(本誌)의 임무」라는 글을 싣고 있는데 그 취지는 다음과 같다. 곧 ‘서울에 시골 있다’라는 속담은 도회지와 지방에 문화의 차이가 있음은 물론이고, 같은 서울 문화라도 높은 것 속에 낮은 것도 있음을 설명해 준다. 이러한 지방, 하층의 저급한 문화야말로 실은 우리 국민의 사상 신앙, 생활의 정미(正米)가 되는 까닭에 국민을 연구하는 재료로는 아주 좋은 것이다. 여기서 민속학이라 함은 ‘Volkskunde’의 뜻으로 국민들 사이에 현존하는 고대 문화의 유물(遺物), 즉 전설, 동화, 속담, 속요, 미신 및 풍의(風儀), 습관 등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다. 이처럼 민속을 ‘고대 문화의 유물’ 곧 고대의 잔존(殘存) 문화로 인식하고 바로 그 ‘지방, 하층의 저급한 문화’로 ‘국민의 사상과 신앙, 생활의 정미’를 탐구한 일본 민속학회의 활동은 번역어 ‘민속 · 민속학’이 정착되는 데에 일조하게 된다.

조선으로의 이입(移入)

당시 일본에서 번역된 민속 · 민속학이 식민지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중반 무렵으로 일제는 이미 통감부 시절부터 조선의 구관(舊慣)과 풍속 습관을 대대적으로 조사하고 있었다. 또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편집과가 정리 및 발간한 “조선 민속자료” 제1편은 『조선의 수수께끼[朝鮮の謎]』(1919)로 그 ‘민속자료’ 역시 조선의 구관과 같은 식민지 민정 풍속 조사의 연장선상에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민속≒풍속’ 조사 사업은 이후에도 약 20년간 여러 사정 기관을 통해 계속 진행되어, 식민지 통치를 위한, 방대한 양의 조사 자료를 산출로 이어졌다. 그 실무자로서 일련의 조사 사업에 깊숙이 관여한 이가 이마무라 도모[今村鞆]와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 젠쇼 에이스케[善生永助] 등이다. 이 중 앞의 2인은 뒤에서 언급하는 조선 민속학회에도 참가한다.

민속 · 민속학을 조선에 이입한 이는 최남선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근대 학지(學知)의 수용 과정에서 주요한 구실을 한 이는 오히려 손진태송석하이다. 특히 손진태의 경우 최남선에 비해 민속 · 민속학에 대한 언급이 시기적으로 별로 늦지 않을 뿐더러 그 기능적 대체물로 토속 · 토속학을 사용하고 있어 주목된다. 손진태가 민속이란 용어를 자주 사용한 것은 1930년대 이후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민속의 사용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1920년대에는 주로 토속이란 용어를 썼다. 이 양자를 모두 고속(古俗)의 잔존물이란 뜻으로 사용하고 있어 토속에서 민속으로, 혹은 토속학에서 민속학으로 전환되는 것이 어떤 연구 방법상의 변화나 사상적 곡절을 함축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다. 민속 · 민속학으로의 용어 전환은 1929년에 창립된 일본의 민속학회 활동에 민감히 대처한 결과로 보인다. 실제 그는 1930년 이후 이 학회의 기관지 『민속학』에 십수 편의 논문을 기고하며 일본의 민속학계에서 조선 민속학의 전문가로서 맹활약을 펼친다. 뿐만 아니라 1932년에는 송석하와 함께 조선 민속학회를 창립하고 이듬해 기관지 『조선민속』을 창간한다. 이를 계기로 조선에서도 민속 · 민속학이 학술 용어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며 1930년대 중후반 조선 민속학회가 펼친 여러 사회적 활동과 함께 언론계를 비롯한 사회 일반에도 점차 수용된다.

다음으로, 송석하의 민속 개념은 1934년 『학등(學燈)』에 기고한 「민속학은 무엇인가」에서 잘 드러난다. 이는 서구와 일본에서 논의된 민속학의 원론적 사안들을 정리한 글로, 민속학은 현대인을 기준하여 원시인, 혹은 고대인의 보편적 성질을 가진 행위와 [그-필자 주] 행위를 설명하는 것의 전승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또 신화학과의 차이를 설명한 대목에서는 현재에도 잔존하는 원시 신앙 혹은 관습을 연구하는 학문이 민속학이라고 주장한다. 즉 신화학은 죽은 화석을 대상으로 삼고, 민속학은 살아 있는 잔존 문화를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송석하 역시 앞의 손진태와 마찬가지로 민속을 고속의 잔존물로 규정한다. 다만 그 연구 목표에서는 둘 사이에 차이를 보인다. 후자의 경우 혼합 민족설에 기초해 민속으로 조선 상고문화(上古文化)의 역사적 재현, 즉 그 기원과 계통 및 변천 과정 탐구에 힘을 쏟는다. 이에 비해 전자는 단지 과거의 재현뿐 아니라 부활과 재생을 꾀하고 그것을 신문화 건설의 토대로 삼고자 매진한다.

기층적(基層的) 민족 문화의 고착화

광복 후 민속 개념의 변화와 관련해 특기할 것은 손진태가 상재한 『조선민족문화의 연구』(1948)이다. 이는 자신이 일제강점기에 추구한 민속학의 주요 논문들을 첨삭과 보정으로 집성한 성과로, 이 책의 서문에 따르면 민속학은 민족 문화를 연구하는 과학이다. 이 정언적(定言的) 명제에 이어 그는 민속학이란 명칭의 부당성을 언급한다. 그리고 “나 자신은 이것을 ‘민족 문화학’이라고 부르고 싶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처럼 민속을 ‘민족 문화학’으로의 개칭(改稱)하고자 하는 그의 바람에 투사된 민족의 재발견과 단일 민족 신화에의 욕망 및 그 배후의 탈식민주의적 정치성은 차치하고, 위의 정언적 명제를 다시 한 번 톺아 보자. ‘민속학은 민족 문화를 연구하는 과학’이라 정의함으로써 민족 문화를 민속학 연구의 대상이나 목적으로 전경화(前景化)하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이 민족 문화라는 수사는 1950년대 이후 후학들에 의해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또 확대 재생산되어, 한국 민속학의 대상과 목적은 물론 그 사명과 의의(意義) 일체를 담보하는 열쇠 말로 자리 잡는다.

그런데 종래의 민속 개념과 민속학의 규정에는 또 하나의 핵심어로 기층문화(基層文化)가 자주 등장한다. 위의 민족 문화와 짝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민속학의 원론적 논의와 각종 개론서에 빈출한다. 이 용어 역시 일본을 경유해 들어온 것인데 그 과정에 이중의 굴절이 존재한다. 하나는 독일 민속학자 나우만(Hans Naumann)의 학설을 일본 민속학이 수용하는 과정에서 일어나고, 또 하나는 그 수용 결과를 한국 민속학이 재수용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나우만의 학설은 역사적 관점이 결여된 독일 낭만주의 민속학의 결함, 즉 그림 형제 이래 민속의 시원(始原)을 고대로 환언하는 무(無) 역사성을 바로잡으려 주창된 것이다. 그에 따르면 향토의 민속재는 출계(出系)를 달리하는 두 계통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하층의 원시적 공동체가 계승, 전달하는 물재(物財) 곧 ‘원시 공동체 문화재’이다. 다른 하나는 상층의 고문화(高文化) 양식이 하층으로 침하한 문화 물상 곧 ‘침강 문화재’이다. 나우만은 이 양자의 발생적 · 역사적 계통을 명확히 분별하는 것을 민속학의 제일 임무로 삼았는데, 결국 향토의 민속재는 대부분 상층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 요점이다. 이 학설이 일본 민속학계에 도입되면서 원시 공동체 문화재와 침강 문화재가 각각 ‘기층 문화’와 ‘표층 문화’로 번역 · 수용된다. 그 과정에서 한 민족의 문화는 표층 문화와 기층 문화의 이중 구조를 이루며, 나우만이 민속학의 대상으로 강조한 것은 후자라는 오독의 굴절이 생긴다. 이윽고 1970년을 전후해 그러한 민족 문화의 이중 구조론이 한국 민속학에 수용 · 공유된다. 요컨대 상층의 가변적 · 외래적인 문화가 표층문화이며 하층의 불변적이고 고유한 문화가 기층 문화이다. 그중 민속학의 대상은 후자라는 인식이 널리 퍼진다. 더불어 이 고정불변의 고유한 기층문화론이 앞의 손진태가 강조한 민족 문화의 수사와 결합해 한국 민속학을 규정하는 금과옥조로 자리 잡는다. 민족의 기층문화인 민속으로 민족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 민속학이라는 항진 명제(恒眞命題, tautologie)가 바로 그것이다.

1970년대 이후 이러한 기층적 민족 문화론이 민속학계를 풍미하는 가운데 1980년대 중반 임재해에 의해 새로운 민속론이 제기된다. 이는 민중의 민속 문화를 엘리트의 고급 문화, 대중의 통속 문화와 견주어 그 문화적 위상을 고찰한 성과로서 “민속 문화는 담당층의 민중성, 생산의 공동성, 매체의 구전성, 생산자와 수용자의 공동체성, 현실 인식의 비판성, 역사적 전통성 등이 상호 관련성 속에 그 문화적 위상을 드러낸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른바 군사 독재 시절의 엄혹한 정치 · 사회적 상황과 그에 대항하는 민중 운동론, 문화 운동론을 배경으로 ‘담당층의 민중성’, 특히 그것이 지향해야 할 ‘현실 인식의 비판성’과 '공동체성'을 특화한 이 민속의 재개념화는 1990년대 중후반 이후 일련의 도시 민속학 논의에서도 되풀이된다. 그에 따르면 민속은 도농(都農)의 공간적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양식 문제로 결정되는 것이다. 민속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문화적 양식으로는 담당층의 민중성, 생산의 공동성, 매체의 구전성, 생산자와 수용자의 동일성, 현실 인식의 비판성, 역사적 전통성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전통적 개념의 양식적 요소들을 두루 갖춘 것이 진정한 민속이라고 임재해는 강조한다.

하지만 문제는 도시 민속의 전승 사례들이 실제 ‘전통적 개념의 양식적 요소들’을 구비할 수 있는지이다. 가령 1980년대 이후 성행하는 현대 민요나 연작 수수께끼와 농담, 시중에 떠도는 이야기, 마당굿 형식의 변혁 굿, 도시 굿당과 점쟁이, 자동차 고사나 야구장 고사, 수능 기원과 입시 주술, 도시의 세시 풍속과 같은 그가 자주 예시하는 보기들은 과연 민중성이나 구전성, 비판성, 전통성 등과 같은 구성 요소를 다 갖추고 있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전통적 개념의 양식적 요소들’을 구비한 민속의 경우 도시부는 물론 농어촌 지역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속학의 대상 부재라는 이 치명적 상황을 둘러싼 방법론적 논쟁과 성찰이 금세기에 이르러 간헐적으로 펼쳐진 까닭인 바, 지금까지의 논의를 간추리고 그 대안적 논의로 넘어가고자 한다.

총괄과 대안적 논의

본디 민속은 한자 문화권에서 고래로 사용되어 온 말로 그 민정 풍속의 원의는 동아시아의 근대에도 엄존한다. 그런데 서구의 포클로어와 폴크스쿤데가 제국 일본에 박래(舶來)하고, 이윽고 그 번역어로 민속 · 민속학이 정착하며 종래의 ‘민속≒민정 풍속’에 의미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그리고 1920년대 중반 민속학이란 근대 학문과 함께 일본에서 이입한 ‘민속=잔존문화’ 개념이 광복 후 민족 문화로 전경화하고, 1970년을 전후해 고정 불변의 기층문화론과 결합한다. 이후 이 ‘민속=기층적 민족 문화’라는 개념이 고착되어 한국 민속학의 지식 생산과 사회 실천을 강하게 규정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민중성을 강조하면서도 공동체의 ‘진정한 민속’을 추구한 임재해의 민속 문화론 역시 그 얽매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이에 한국 민속학이 방법론의 폐색(閉塞)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기층적 민족 문화론의 항진 명제, 곧 본질주의 민속관의 해소가 급선무이다. 그것은 독일에서 생산되고 일본을 경유해서 한국으로 들어온 선험적 이데올로기로서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생활 주체들을 ‘민속의 보유자’나 ‘전승 주체’란 이름으로 객체화해 민속의 소멸 이야기와 그 구제의 욕망을 지속적으로 양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주체 없는 민속 연구에서 다성적(多聲的) 생활 주체들의 삶과 그 사회 관계 등의 탐구로 민속학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려면 어떠한 민속 개념이 새로이 강구되어야 하는가? 그 방법론적 대안 마련과 관련해 주목되는 성과가 「포스트제국의 문화 권력과 버내큘러: 민속학으로 일상을 묻다」라는 국제 심포지엄이다. 2019년 여름에 실천 민속학회가 주최한 이 학술 대회에는 한중일의 동아시아 삼국을 비롯한 미국과 독일어권의 민속학, 문화학 전문 연구자가 다수 참가해 ‘버내큘러(vernacular)’와 ‘일상’을 핵심적인 주제어로 열띤 논의를 펼쳤다.

그중 ‘동아시아 민속학’의 재정립을 주창한 이와모토 미치야[岩本通彌]의 논의가 우선 특기할 만하다. 그는 지난 약 100년간 동아시아에서 일반화한 ‘민속학’이란 용어의 성립 과정을 실증적으로 고찰한다. 이를 바탕으로 주체인 ‘민(民)’의 강조와 함께 ‘속(俗)’의 의미를 흔하디 흔한 일상으로 재해석한다. 그리고 종래 민속의 문화재화를 추구한 동아시아의 민속학을 ‘일상학’으로 전회(轉回)하자고 제언한다. 이 경우 대개 인식하기 곤란한 존재인 일상이나 생활의 당연지사들을 어찌 포착할지가 문제인데, 그것들은 기이한 존재가 일상화라는 보통의 것, 곧 흔하디흔한 사상이 되어 가는 과정과 그 당연한 현상이나 생각 등이 해체되어 가는 과정에서 비로소 의식된다. 그가 강조하는 ‘일상’이란 이러한 동적인 과정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왜 그것이 그러한지, 당연함이 당연하게 된 까닭을 묻는 분석 개념이기도 하다. 미세한 지역적 차이나 시대적 차이를 주시함으로써 당연한 존재의 어긋남이나 상실을 논거로 삼아 온 민속학이야말로, 그 당연함의 변화가 가속화한 현대 사회에서 오히려 유의미하고 시의적절한 학문이라고 역설한다. 독일민속학의 일상 개념을 원용한 이와모토의 논의는 요 몇 해 사이에 미국을 중심으로 포클로어를 갈음해 새로이 부상한 버내큘러의 문제 의식과도 상통한다.

위의 학술 대회에서 여러 논자들이 언급하였듯이 버내큘러는 흔히 권위 있는 라틴어에 대한 세속의 말, 곧 속어(俗語)의 의미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 이 ‘라틴어에 대한 속어’가 상징하듯이 버내큘러는 보편에 대한 토착, 중앙에 대한 지방, 중심에 대한 주변, 문자에 대한 구술, 권위에 대한 반 권위, 정통에 대한 이단 등의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요컨대 지배적인 문화, 즉 제도화한 문화 권력의 자장권(磁場圈)에서 토착, 지방, 주변의 생활 주체들에 의해 끊임없이 영위되는 국지 · 비공식 · 실제의 창발적인 발화와 행위가 버내큘러와 다르지 않다. 이러한 근현대의 다종다양한 버내큘러 문화를 이론과 실제의 양면에서 살펴 그 일상의 실존적 실천들이 문화 권력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지배와 저항, 혼성, 모방, 전용, 환류 등의 여러 형태로 생산 · 소비되는 과정과 함의를 천착(穿鑿)한 성과가 바로 『문화권력과 버내큘러』(2020)로, 이는 종래의 정태적인 본질주의 민속 개념에서 탈각(脫却)하는 데 유익할 것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임재해, 『민속문화론』(문학과 지성사, 1986)
남근우, 『한국민속학 재고: 본질주의와 복원주의를 넘어서』(민속원, 201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편, 『문화 권력과 버내큘러』(소화, 2020)

논문

남근우, 「민속 개념 재고」(『실천민속학연구』 21, 실천민속학회, 2013)
이와모토 미치야, 「동아시아 민속학의 재정립: ‘일상학'으로의 전회」(『문화 권력과 버내큘러』, 소화, 2020)
임재해, 「민속학의 새 대상과 방법으로서 도시 민속학의 인식」(『한국 민속학과 현실 인식』, 집문당, 1997)
岩本通彌, 「『民俗』槪念考:柳田國男が一國民俗學を唱得るとき」(『超域文化科學紀要』 25, 東京大學/駒場,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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