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속학회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민속을 수집해 연구하고 민속학의 지식 생산과 사회 실천에 종사한 학술 단체이다. 송석하, 손진태, 정인섭의 주도로 1932년 4월에 창립되어 광복 직후까지 활동을 이어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속학회로서 기관지 『조선민속』을 통권 3호까지 발행하고 민속극의 가면 전람회나 ‘조선향토무용민요대회’ 개최와 같은 사회 활동도 펼쳤다.
회칙에 따르면, 조선민속학회(朝鮮民俗學會)는 민속학에 관한 자료를 조사해 수집하고 민속학 지식의 보급과 연구자의 친목, 교순(交詢) 및 외국 학회와의 교류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무엇보다 중시할 것은 기관지 『조선민속』의 발행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속학 전문 학술지로 학회 창립 이듬해인 1933년 1월에 창간호, 1934년 5월에 2호, 1940년 10월에 3호가 각각 발행된다. 지면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 2호의 경우 우선 학회의 핵심 인물들이 기고한 학술 논문이 본문의 앞쪽에 놓인다. 이어 회원들이 보고한 다양한 자료들이 뒤따른다. 구체적으로 조선 각지의 민속 사상을 자료화한 글들과 조선민속학 연구에 필요한 외국어 참고문헌 목록, 그리고 지난 1년간 국내외 잡지에 실린 조선민속학 관계 문헌의 서지 정보가 차례대로 실린다. 이처럼 학술 논문과 자료 보고의 이원 체계로 지면이 구성되는데, 이는 학회의 설립 목적을 구현하려는 편집상의 배려와 조치로 보인다. 다만 3호의 경우 이마무라 도모의 고희 기념 특집으로 발행되어 이전과는 조금 다른 구성과 모습을 보인다.
조선민속학회는 대중들을 향한 사회 활동도 펼쳤다. 1933년 정월에 경성의 유흥문화공간 ‘낙랑파라(樂浪 parlour)’에서 개최한 가면 전람회, 그리고 1937년 초파일에 황해도 봉산탈춤을 경성으로 초대해 부민관의 액자 무대에 올린 제1회 ‘조선향토무용민요대회’가 좋은 예시이다. 특히 조선향토무용민요대회는 이듬해 봄 조선일보사가 성대히 개최한 ‘민속예술대회’로 이어졌다. 이 대회를 전후로 송석하는 『조선일보』에 두 편의 글을 기고해, 조선의 향토 예술을 둘러싼 사회정책상의 공리적 입장과 그에 기초한 민속의 현대적 부활을 강조했다. 그의 이러한 실천적 조선민속학은 이후 여러 논고와 좌담회의 발화 등을 통해 경세제민의 오락 선도론(善導論), 생업보국(生業報國)의 농촌 오락론으로 확장되었다. 일제 말기의 총력전 체제하에서 그것들이 갖는 사회적 함의와 정치성이 당시 민속학계의 쟁점이었다.
조선민속학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속학 학술 단체로서 광복 직후까지 조선의 민속과 민속학에 관한 지식 생산과 사회 실천의 중심적 구실을 수행했다. 또한 송석하와 손진태 등이 추구한 조선민속학의 방법론과 사상적 영위는 1950년대 이후 민속학 연구의 내포와 외연을 오랫동안 규정해 왔다. 특히 송석하가 『조선민속』의 창간사에 가탁한 민속의 소멸 이야기, 나아가 바로 눈앞에서 사라져가는 고유한 민속자료를 구제하겠다는 그의 강렬한 의지와 욕망은 1954년에 발족한 한국민속학회, 1969년에 출범한 한국민속연구회 등을 거쳐 현재의 한국민속학자대회에서도 승계되었다.
종래 조선민속학회의 창립과 활동은 일제강점기의 엄혹한 사회 상황에서 펼쳐진 저항적 실천 운동으로 평가되어 왔다. 하지만 현재는 학회의 성립 배경과 활동 내용 및 핵심 인물들의 조선민속학에 관한 세밀한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 이러한 민속학계의 통설은 성립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송석하의 실천적 문화민족주의가 강조한 사회정책상의 공리적 입장과 거기에 내재된 교화의 시선은 일제의 식민주의 오락 정책과 후생 운동 및 그 규율, 동원의 논리와 공액(共軛) 관계로 귀결될 위험이 있었다. 실제 조선총독부의 농촌진흥운동 직후부터 일제의 패망에 이르기까지 10여 년, 송석하의 조선민속학회가 추구한 사회적 실천은 일제의 어용과 조선 민중의 실용 사이에서 미묘한 진자(振子) 운동을 펼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