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 이후 일본의 식민통치가 무단통치에서 이른바 문화정치로 바뀌면서 한국인이 경영하는 3개 신문사가 조선총독부로부터 허가를 받았다. 그 중 친일실업인들의 모임인 다이쇼실업친목회(大正實業親睦會)를 배경으로 하여 나온 것이 조선일보사이다. 다이쇼실업친목회 회원을 중심으로 한 39명이 1919년 10월 자본금 20만 엔(圓)으로 조선일보설립발기인조합을 구성, 지류도매상을 하던 경성부 관철동 249번지의 한옥 1층에 창간준비사무실을 차리고, 신문명진보주의(新文明進步主義)를 사시(社是)로 내걸었다.
이 신문사는 초대 사장에 조진태(趙鎭泰, 다이쇼실업친목회 부회장, 천일은행장), 부사장 겸 발행인 예종석(芮宗錫), 편집국장 최강(崔岡), 영업국장 권병하(權丙夏) 등으로 간부진이 짜여졌다. 이 때의 사원 수는 편집·영업 양쪽이 각각 15명 정도였다.
1920년 3월 5일 배대판(倍大版) 4면의 창간호를 석간으로 발행하였다. 그러나 이 신문사는 자체 인쇄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총독부기관지였던 매일신보사 시설을 빌려 신문을 찍었다. 이러한 형편 때문에 2호는 7일에, 3호는 9일에 나왔고, 그 다음에는 장기휴간에 들어갔다가, 4호는 4월 28일에 겨우 속간되었다. 그리고 29일에는 삼각동 71번지로 신문사 사옥을 이전했다.
이후 조선일보사는 경영난으로 내분이 잦았고, 운영권이 여러 차례 바뀌는 곡절을 겪었다. 2대 유문환(劉文煥), 3대 남궁훈(南宮薰)을 거쳐 4대 이상재(李商在), 5대 신석우(申錫雨) 사장(1927.3.∼1931.7.)에 이르러 비로소 틀이 잡히기 시작하였다.
1927년 7월 5일에는 견지동 111번지에 2층 벽돌로 된 새 사옥을 신축, 입주하였다. 이는 창간 이래 세 번째 사옥 이전이었다. 이른바 『조선일보』를 중흥시켰다는 신석우도 몇 차례에 걸친 정간처분과 동아일보사와의 치열한 경쟁으로, 결국은 경영의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여 운영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 뒤 6대 안재홍(安在鴻), 7대 유진태(兪鎭泰), 8대 조만식(曹晩植) 사장을 거치면서 계속 경영권 분규를 겪다가 1933년 7월 평안도의 광산갑부인 방응모(方應謨)가 경영권을 장악함으로써 조선일보사는 다시 기틀을 잡게 되었다.
9대 방응모(1933.7.∼1953.8.) 사장은 조선일보사를 주식회사로 전환시켰다. 방응모는 또한 ‘정의옹호·문화건설·산업발전·불편부당’을 사시로 결정하였고, 문화사업을 벌여 사세확장과 명예를 한꺼번에 얻는 수완을 보였다. 또한 1933년 12월 20일 지금의 자리에 신축사옥을 준공시켰는데, 동아일보사와 대각선으로 마주보는 위치였다. 한편, 1935년 이후부터는 『조광』(1935년 창간)·『여성』(1936년 창간)·『소년』(1937년 창간) 등의 월간지도 잇달아 발행하였다. 방응모는 일본이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망하자 1940년 8월에 폐간되었던 『조선일보』를 1945년 11월 23일 속간하였다. 그는 6·25전쟁의 와중인 1950년 7월에 납북된 뒤 소식이 없는 상태이다.
10대 장기영(張基榮) 사장을 거쳐 13대 방우영(方又榮) 사장은 1970년에 취임하였고 1993년 대표이사 회장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20여 년간 조선일보 경영을 지휘했다. 그의 형인 방일영(方一榮)은 12대 사장을 지냈다. 이들 형제는 박정희(朴正熙)·전두환(全斗煥)의 3∼5공화국을 거치면서 『동아일보』와 더불어 ‘제도언론’이라는 혹심한 평가를 받으면서도 경제적으로는 튼튼한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그 밖에도 조선일보사는 자매지로서 중학생과 국민학생을 위한 『소년조선일보』(1955년 1월 창간, 1965년 2월 22일 복간), 주간교양지인 『주간조선』(1968년 10월 20일 창간), 월간종합지인 『월간조선』(1980년 4월 1일 창간), 건전한 레저와 국토지리지를 겸하는 『월간 산』 (1980년 6월 1일 혁신호 발행), 낚시전문지 『월간낚시』(1984년 5월 1일 창간), 『FEEL』(1993년 9월 창간)을 펴내고 있으며, 1988년에는 조선일보미술관을 신축, 개관하였고, 1990년에는 『스포츠조선』을 창간하였다.
1993년 3월 10일 방상훈(方相勳)은 14대 사장으로 취임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영을 맡고 있다. ‘정확성·공정성·비판성’을 중시해 취임 직후 기사실명제와 옴부즈맨 제도를 도입하는 등 새로운 혁신을 주도했고, 취임 때부터 “인터넷 뉴미디어 시대를 맞아 종합정보산업의 기수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방상훈은 1996년 10월 2일 언론사 중 처음으로 뉴미디어 전문 자회사인 디지틀조선을 설립, 10월 19일부터 인터넷신문서비스를 개시하여 종합미디어그룹을 향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특히 밀레니엄 첫해인 2000년 1월 방상훈 사장과 방우영 회장이 “디지털 시대,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자”는 경영방침을 공표한 이후, 미디어 융합을 대비한 동영상뉴스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결과 2007년 4월 10일부터는 조선일보의 자매회사인 디지틀조선일보가 케이블TV채널인 ‘비즈니스앤’(business&)을 개국하기도 하였다. 또 2008년 3월 5일부터는 종이신문에 실린 기사·사진·그래픽을 컴퓨터 화면을 통해 HD(고화질) 영화를 보듯 선명하고 또렷한 활자로 볼 수 있는 서비스인 ‘조선일보 아이리더’(ireader) 서비스를 개시하였다.
그 밖에도 주요 연례사업으로서 청룡기 전국중·고교야구선수권대회, 전국중·고교축구선수권대회, 전국마라톤선수권대회, 신인음악회, 청룡영화상, 청룡봉사상, 국악대공연, 기왕전(棋王戰), 전국종합아이스하키선수권대회 등을 개최하고 있다.
2011년 2월 TV조선을 설립, 같은 해 12월 1일 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