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태는 1920년대 중반 와세다 대학에서 역사학과 인류학, 민속학을 본격적으로 수학하였다. 그리고 방학 때마다 조선의 민속자료를 찾기 위해서 시골의 농 · 산촌을 중심으로 현지 조사에 나섰다. 동시에 세계 굴지(屈指)의, 동양학 도서관인 동양문고를 드나들며 조선의 민풍토속(民風土俗)에 관한 동양의 문헌 자료들을 수집 · 정리하고 그것을 분석 · 고찰하는 데에 필요한 서양의 전문 서적들을 독파하였다. 이러한 동서양의 방대한 문헌을 섭렵하고, 현지 조사로 자료화한 민속 사상들을 바탕으로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중반에 걸쳐 조선과 중국의 민족문화에 관한 연구 성과를 일본과 조선의 여러 잡지에 발표하였다. 그중 주요한 18편의 논문을 추려 첨삭과 보정을 가해 상재(上梓)한 책이 『조선민족문화의 연구』이다.
『조선민족문화의 연구』는 A5판이고 총 492면이며 을유문화사에서 간행되었다. 이 책은 서문과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문은 사회편과 종교편으로 나뉜다. 전자에는 주로 전통사회의 풍속 습관을 고찰한 7편의 논문이 들어 있다. 즉 고인돌을 비롯해 고대의 민가 형식, 온돌, 데릴사위 혼속, 과부 약탈혼, 석전(石戰)의 기원과 계통 및 변천, 그리고 감자의 전파 과정을 차례대로 천착(穿鑿)한 글이다. 후자에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민간 신앙을 각각 거론하거나 비교한 논문, 혹은 민간신앙의 기원과 변천을 몽골과 만주 등지의 북방 지역과 관련지어 고찰한 논문이 11편 실려 있다. 가령 ‘서낭당[累石壇]’을 필두로 솟대, 장승, 산신(産神), 복화무(腹話巫), 맹인(盲人) 점복자(占卜者)인 맹격(盲覡), 광명 신앙과 태양 숭배, 그리고 중국의 웅계(雄鷄) 신앙, 혼에 관한 신앙과 학설 등을 분석한 글이다. 목차 뒤에는 관련 사진들이 22면이나 제시되어 1920 · 1930년대의 풍속 습관과 민간 신앙의 한 측면을 이해하는 데 유익하다. 또 본문 뒤에는 관련 정보를 제공한 ‘담화자’의 이름과 출신 색인, 인용한 서목(書目) 색인, 그리고 내용 색인을 덧붙여 학술서로서 충실을 기하고 있다.
조선의 민속자료와 관련 문헌 사료를 연계해 한민족의 형성과 민족 문화의 기초 구성을 천착한 이 책은 일제강점기에 손진태가 추구한 조선 민속학의 결정체로 평가된다. 또한 본문에 수록된 18편의 논문은 관련 연구 분야나 주제의 초석(礎石)으로서 아직도 영향력을 유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와 함께 특기(特記)할 것은 서문이다. 그 이유는 들머리에서 ‘민속학은 민족 문화를 연구하는 과학’이라고 정언적(定言的)인 명제를 제시하고 그 명칭을 ‘민족문화학’으로 바꿔 부르고 싶다고 역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미에선 이 책에 수록한 주요한 18편의 저본(底本)을 동학들에게 보지 말라고 당부한다. 자신의 방법론에 상당한 변화가 있어 과거의 논문들은 전면적으로 일단 폐기하려는 의도라고 그 까닭을 밝히기도 한다. 이렇게 ‘민속학’을 ‘민족문화학’으로 개칭(改稱)하고자 했던 그의 바람과, 방법론의 변화에 가탁(假託)한, 과거 논문의 첨삭과 보정, 그리고 그와 연동하는 신민족주의의 자기 현시적(顯示的)인 주장과 그 정치성에 관해서는 일찍이 민속학계에서 비판적인 연구 성과가 제시되었다. 이는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종래의 손진태 연구에서 반(反) 식민주의 사관으로 우상화한 신민족주의를 상대화하고, 해방 후 그 세례(洗禮)로 거듭난 ‘민족문화학’의 정치성을 해체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