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천군 ()

대동여지도 중 함경남도 문천 부분
대동여지도 중 함경남도 문천 부분
인문지리
지명
함경남도 남부에 있는 군.
내용 요약

문천군은 함경남도 남부에 있는 군이다. 낭림산맥과 마식령산맥의 여맥이 군내에 뻗어 있어 서남부 일대는 산악 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동부 일대는 비옥하고 관개가 편리한 충적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재위하던 시기에 매구루(買溝婁) 또는 미구루(味仇婁)라고 불렀다. 신라 진흥왕 때 차지하였으나 방어하기 어려워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건국 이후 동북변의 여진족을 토벌하여 수복하고 문주(文州)라고 명명하였다. 몽골이 설치한 쌍성총관부의 지배를 받다가 1356년 공민왕 때에 되찾았다. 1413년 군현의 명칭을 개칭할 때 문천군이 되었다.

정의
함경남도 남부에 있는 군.
개관

동쪽은 영흥만(永興灣)을 사이에 두고 동해에 임하고, 서쪽은 평안남도 양덕군, 서남쪽은 황해도 곡산군, 남쪽은 원산시와 강원도 이천군, 북쪽은 고원군에 접하고 있다.

동경 126°50′∼127°28′, 북위 38°50′∼39°56′에 위치하며, 면적 1,380.65㎢, 인구 11만 1050명(1944년 현재)이다. 1개 읍 7개 면 240개 이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문천면 옥평리이다.

자연환경

지세는 낭림산맥이 평안남도와 경계를 이루면서 남북으로 뻗어 있고, 남쪽에는 마식령산맥이 황해도와 강원도와의 경계를 형성하였다. 이 두 산맥의 여맥이 군내로 뻗어 있어서, 서남부 일대는 산악 지대를 이루고 있다.

대표적인 산으로는 두류산(頭流山, 1,324m) · 고춘봉(高春峰, 1,121m) · 이덕산(梨德山, 1,298m) · 응봉산(鷹峰山, 1,665m) · 명이덕산(蓂夷德山, 1,585m) · 봉황산(鳳凰山, 1,259m) · 육판덕산(陸板德山, 1,325m) · 가사산(袈裟山, 1,381m) 등이 있으며, 이 밖에 마식령(馬息嶺, 788m) · 진령(眞嶺, 950m) · 토현(土峴, 804m) 등의 산이 있다.

두류산에서 발원하는 전탄강(箭灘江)영흥평야를 거쳐 고원군의 덕지강(德池江)에 합류하며, 장수봉(將帥峯, 629m)에서 발원한 남천강(南川江)과 마식령 · 장림령(長林嶺)에서 발원한 심포천(深浦川) · 장림천(將林川) 등은 영흥만에 유입한다. 이들 하천은 그 유역에 비교적 넓은 충적평야를 발달시켜 군의 동부는 토지가 비옥하고 관개가 편리한 평야 지대로 되어 있다.

해안선 연장은 총 87㎞이며, 비교적 굴곡이 심하고, 영흥만 · 송전만(松田灣) 등의 만을 이루고 있으며, 이 밖에 함구미만(咸口尾灣)이 있다. 군의 동부는 결정편마암계이며, 서부는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기후는 서부 산악 지대의 경우 대륙성 기후의 영향으로 한서의 차가 심하지만, 동부의 평야 지대는 동해와 서북풍의 영향을 받아 온난하다. 동부 평야 지대는 같은 위도의 서해안보다 연평균 기온이 1℃, 1월 평균 기온은 4.4℃가 높으며 강우량도 약 2배이다. 연평균 기온 10.1℃, 1월 평균 기온 -3.9℃, 8월 평균 기온 23.6℃, 연 강수량 1,264㎜이다.

역사

[고 대]

구석기 · 신석기 시대는 물론 청동기시대의 유물 · 유적도 아직까지 발견된 바 없으나, 인근 영흥군에서 청동기시대 유물 · 유적이 많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에는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군은 한사군 · 동예 등에 속하였다가 56년(태조왕 4) 고구려 영토가 되었다. 244년(동천왕 18) 위나라의 관구검(毌丘儉)의 침공으로 국내성이 함락되었을 때 동천왕이 멀리 동해안의 이곳으로 피난한 적이 있었다.

410년(광개토왕 20) 이곳을 매구루(買溝婁) 또는 미구루(味仇婁)라고 불렀으며, 568년(진흥왕 29)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뒤 그 세력이 이곳에까지 뻗쳤으나 조정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방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곧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668년(보장왕 27)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한 뒤 한때 당나라의 영역에 속하였다. 신라의 삼국 통일 직후인 698년(효소왕 7)에 건국한 발해는 그 남쪽으로 평안도와 함경도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신라는 733년(성덕왕 32) 당나라의 강요로 발해의 남쪽(지금의 함경남도 지방)을 공격하였으나 겨울철 큰 눈으로 인하여 성과 없이 물러났다.

이보다 조금 앞서 721년 북쪽 국경에 장성을 쌓았다고 하는데, 이 때 쌓은 장성이 영흥 고장성(古長城)에 비정되기도 하므로, 이 때까지 신라가 근근히 영흥 지방을 지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말갈족(여진족)이 점차 남하하여 영흥 · 안변 지방까지 내려와 살면서 변경 지역에서 노략질을 많이 하였다.

[고 려]

고려 건국 뒤 골암성(鶻巖城:지금의 안변) 성주 윤선(尹瑄)이 굴복해 오자, 920년(태조 3) 태조는 이곳에 유금필(庾黔弼)을 파견하여 동북변의 여진족을 회유, 토벌하고 개척에도 힘썼다. 그 결과 안변 · 영흥 · 함주 등이 수복되었다.

973년(광종 24) 화주방면의 장평진(長平鎭) · 박평진(博平鎭) · 고주(高州) 등에 각각 성을 쌓아 변방 방어에 대비하였다. 이 군의 옛 이름을 매성(妹城) 또는 이균(伊均)이라 하였는데, 고구려 때의 명칭이었던 것 같다.

989년(성종 8) 옥녀봉(玉女峰) 밑에 성을 쌓아 문주(文州)라 하고 방어사를 두었다. 이 군은 소속 도명이 여러 번 바뀌었는데, 995년 삭방도(朔方道), 1036년(정종 2) 동계(東界), 1047년(문종 1) 동북면 또는 동면 · 동북로, 1178년(명종 8)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 1263년(원종 4) 강릉도(江陵道), 1356년(공민왕 5) 강릉삭방도(江陵朔方道)로 변천하였다. 그리고 뒤에 곧 동북면으로 고치더니, 1360년 다시 삭방강릉도라고 불렀다.

1258년(고종 45) 조휘(趙暉) · 탁청(卓靑)이 동북면병마사 신집평(愼執平)을 살해하고 화주이북의 땅을 가지고 몽고에 투항하자, 몽고는 철령 이북에 쌍성총관부를 두어 100년 가까이 통치하였고, 이곳도 자연히 그 지배를 받게 되었다.

1356년 공민왕이 반원 정책을 써서 유인우(柳仁雨)로 하여금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함락하게 하였을 때 이 지역도 다시 고려 땅이 되었다.

[조 선]

1413년(태종 13) 주자(州字) 붙은 군 · 현의 명칭을 산(山) · 천(川)으로 개칭할 때 이 군은 문천군이 되었다. 이 때 군치(郡治)를 아미산(峨眉山) 서쪽 현재의 남산리로 이전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1432년(세종 14) 현재 호수 450호, 인구 953명이고, 간전(墾田) 3,103결(수전은 10분의 1)이었다. 군사 체제는 지군사(知郡事)가 영흥도우익병마(永興道右翼兵馬)를 겸하였으며, 관하(管下)에 운림진(雲林鎭)을 두었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한 달도 못 되어 서울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왜장 가토(加藤淸正)가 함경도로 쳐들어와 이듬해 정월까지 함흥 · 단천 · 길주 · 회령 등지를 점령하였는데, 이 군 역시 왜군의 점령 아래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 때는 청군의 일부인 몽고군이 함경도를 거쳐 철수함으로써 이 군도 또 다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1759년(영조 35) 현재 방리(坊里)는 군내(郡內) · 초한(草閑) · 명효(明孝) · 구산(龜山) · 도지랑(都之郎) · 운림(雲林)의 6개 사로 이루어졌으며, 호수는 1,743호, 인구는 8,273명(남 4,621명, 여 3,652명)이었다.

[근 대]

1872년(고종 9)에 편찬된 『문천읍지』에 의하면, 방리는 변함이 없으나 호수는 1,513호, 인구 1만 313명(남 6,091명, 여 4,222명)으로서 호수가 줄어드는데도 오히려 인구는 조금 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1895년 지방관제 개혁 때 문천은 함흥부에 속한 군이 되었다. 그 뒤 부 · 군제의 불합리한 점이 많이 발견되어 이듬해 다시 도 · 목 · 부 · 군제로 환원되고, 함경도는 남북 2도로 나누어졌는데, 문천군은 함경남도에 속하였다.

1906년 군내 · 초한 · 명효 · 구산 · 도지랑 · 운림의 6사를 각각 면으로 고쳤다가 1914년 3월 지방 행정구역 개편 때 초한면과 도지랑면을 합하여 도초면으로 고쳤다.

1922년 군청을 현재의 문천면 옥평리에 옮겼다. 1936년 명효면과 구산면을 합하여 명구면으로 하고, 군내면에 도초면의 남부인 함평리 등 15개 이를 분할, 편입하여 문천면으로 개칭하였다.

그 뒤 1942년 4월 덕원군을 없애고 그 북부 지역을 문천군에, 남부 지역을 원산부에 병합할 때 문천군은 덕원 · 북성 · 풍산 · 풍하의 4개 면을 편입함으로써 모두 8개 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다음해 10월 도초면이 천내읍으로 승격됨으로써 천내읍과 문천 · 명구 · 운림 · 덕원 · 북성 · 풍산 · 풍하의 1개 읍 7개 면으로 이루어진 군이 되었다.

이 군에서 일어난 독립 운동은 이렇다할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노동쟁의로서는 1928년 9월 영국인이 경영하는 라이징 · 산석유회사의 노동자 200여 명이 저임금과 박대에 항의하여 파업을 일으킨 바 있다. 원산노동조합연합회(元山勞動組合聯合會) 등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으나 일본 경찰의 모진 탄압을 받아 좌절하고 말았다.

또 1936년 1월 농민조합사건이 터져 문천을 비롯한 원산 · 함흥 · 흥남 · 홍원 등에서 1,00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 사건은 최고 책임자가 문천 출신의 김병후(金炳候)이고, 이곳에서 검거된 사람이 가장 많기 때문에 문천농민조합사건이라고도 한다.

유물 · 유적

남창리에서 청동기 시대의 토광묘가 발굴되었으며, 고성리에서 고구려 시대 산성의 일종인 토성이 발굴되었다. 망덕산성지(望德山城址, 일명 鐵關城址)는 757년(경덕왕 16)에 쌓았다는 석성의 터로, 고려 공민왕 때 이곳에서 여진의 침공을 막아 낸 일로 유명하다.

성저리와 용진리에는 고려 때 여진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하여 쌓았던 금성성지(金城城址, 일명 金陽石城址)와 용진고성지(龍津古城址)가 있다.

이 밖에 문봉리의 달산성(達山城), 도창리의 석성, 직동리의 석성, 풍전리의 토성, 신창리의 운림진석성지(雲林鎭石城址), 옥녀봉의 고이균성지(古伊均城址), 할미석성지, 선주리의 선주성지(宣州城址), 쟁경리의 성지 등이 있다.

성저리에는 고려 시대 석불이 있으며, 영안리 명적사(明寂寺)는 신라 시대에 건립되어 군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유명하다. 이 밖에 삼대리의 장림사(長林寺), 도창리의 도창사(道昌寺), 영암리의 적조암(寂照庵) 등의 사찰이 있다.

신안리에는 송시열(宋時烈)을 배향하던 사액서원인 용진서원(龍津書院)이 있었고, 만포리에 문포서원(汶浦書院)이 문포영당(汶浦影堂)과 함께 있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모두 훼철되었다.

능전리에는 조선 태조의 증조모 무덤인 숙릉(淑陵)이 있다. 이 능은 봉분 지름이 4.8m, 높이가 2.28m나 되며, 능묘 주위에는 12개의 병풍 호석을 두르고 있다. 석등 · 석상을 구비하였고, 능의 전면에는 문석인 · 무석인 · 마석 등이 배열되어 있으며, 정자각도 세워져 있다.

염동리의 우교비각(牛橋碑閣)은 송시열이 유배당하였을 때 거처하던 곳에 뒷날 이 지방의 유생들이 건립한 것이다. 봉수지는 문봉리 · 옥평리 · 신창리 · 방고개 이 · 덕평리 · 구덕리 등의 군계 산꼭대기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다.

교육 · 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문천향교(文川鄕校)와 용진서원 · 문포서원 등이 있었다. 용진서원은 1695년(숙종 21) 북성면 신안리에 건립되어 경학을 강하면서 송시열을 향사하였으며, 문포서원은 1719년 문천면 만포리에 건립되어 경학 공부와 더불어 역시 송시열을 향사하였다. 이 두 서원은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모두 훼철되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1면 1교 교육 정책에 따라 읍 · 면에 각 1개교의 초등학교가 세워졌다. 1928년 덕원면 송하리에 덕원권업모범지장(德源勸業模範支場)이 설립되고, 1929년 덕원공립농업보습학교(德源公立農業補習學校)로 되었으며, 1934년 공립덕원농업공민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가 3년제 덕원을종농업학교로 승격되었고, 1938년 5년제 덕원갑종농업학교로 다시 승격되었다.

덕원면 어운리에는 신부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덕원수도원(德源修道院) 병설의 특수학교가 있는데, 초등학교 졸업생을 입학시켜 13년간에 걸쳐 대학 과정 정도의 신부 수업을 시켰다. 1943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1개교, 농업학교 1개교, 신학교 1개교가 있다.

종교 분포 상황을 보면 불교 사찰 9개, 천주교 성당 1개 및 공소 4개, 개신교 교회 7개, 천도교 종리원 1개가 있다. 사회 복지 시설로는 명구면 추미리에 문천감화원(文川感化院, 일명 永興學校)이 있는데, 부랑아를 수용하여 6년 과정의 초등학교에 준하는 교정 교육을 하며, 목공 · 농업 · 어업 등의 기술도 가르쳤다.

이 고장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왕이 되기 전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하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은 두류산에서 왕이 되려고 수업을 하던 이지란(李之蘭)을 물리치고 무예를 닦은 설화가 전한다.

이성계가 젊은 시절 임금이 될 큰 꿈을 안고 무예 수련차 전탄강 상류 두류산으로 들어갔는데, 이곳에는 이미 이지란이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임금이 되려고 도를 닦고 있었다. 이지란은 선천적으로 임금이 될 상징인 용수(龍鬚)를 달고 있었다. 때를 기다리며 정성을 다하던 이지란은 젊은 이성계의 무예가 뛰어남에 감탄하면서 장차 부하 장수로 삼으려고 딸을 주어 사위로 삼았다.

이성계도 나름대로 이지란을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그 용수 때문에 임금 자리가 어려울 것 같아서 고민 끝에, 어느 날 장인인 이지란에게 닭똥 술을 먹여 크게 취하게 하여서 인사불성되게 한 다음 그 수염을 모조리 뽑아 버렸다. 이지란이 깨어나 보니 기가 막히고 말할 수 없이 분하였다. 이제 임금의 꿈이 깨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복수심이 일었다.

한 번은 이지란이 엿보고 있노라니 이성계가 변소로 들어갔다(변소라 해야 거적을 드리운 조그만 장소이다.). 이지란은 옳다구나 하고 활을 들어 살을 세 개나 쏘아 댔다. 그리고는 이제 활에 맞아 죽었으리라 생각하며 돌아서려니까 뒤에서 “장인어른! 이렇게 위험한 장난을 하다가 다치면 어쩔려고요?”하면서 한 손으로는 바지춤을 잡고, 한 손에는 화살 세 개를 꺾어 쥐고 나오는 것이었다. 이지란은 깜짝 놀라 다른 계책을 세워 이성계를 죽이려 하였다.

어느 날 이른 새벽 이성계가 자는 방문을 느닷없이 열고 들어서면서 큰 검으로 누워 자는 이성계의 목을 내리쳤다. 그런데 당연히 두 동강이가 났을 이성계가 검 위에 냉큼 올라앉아 빙그레 웃고 있는 것이었다. ‘보통 놈이 아니구나!’ 하고 마음 든든히 먹은 이지란은 이번에는 무예 연습을 한다고 전탄강 상류의 푸른 물 천 길 낭떠러지 위로 유인하였다가 안심시킨 뒤에 별안간 벼랑에서 힘껏 밀어서 떨어뜨렸다. 절벽으로 굴러 떨어지는 이성계를 보고 이지란은 이제는 끝났다는 생각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성계가 먼저 와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장인! 한 번만 더 이런 짓을 하면 이번에는 내가 가만 있지 않겠소.”하고는 부하로 들기를 명하였다. 그때부터 이지란은 임금의 꿈을 포기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한다.

민요로는 철원에서 함경남도 지방까지 널리 불려지며, 함경남도 지방의 대표적인 민요라 할 수 있는 〈신고산타령〉이 있다. 특히, 천내리의 공업 발달로 이 고장의 〈신고산타령〉에서는 “신고산이 우루루/함흥차 떠나는 소리에/천내리 공장 큰애기는/밤봇짐만 싸누나/(후렴)어랑어랑 어허랑/어루람마 디허라/몽땅 내 사랑 이로구나.”라는 사설이 널리 불려졌다.

후렴 첫 구절을 따서 ‘어랑타령’이라고도 하는 이 〈신고산타령〉은 ‘신고산’만 엮는 것이 아니라 “불원천리 허우단심/그대 찾아왔건만/보고도 본체 만체/돈담무심……”이라는 떠나간 남자를 찾아온 여인의 심정 등 여러 사설을 엮는 타령에 얹어 경쾌하고도 구성지게 불러 향토색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내용의 사설은 〈애원성〉에도 실어 불려졌다.

이 밖에도 이 고장에서는 〈단오요〉 · 〈칠석요〉 · 〈베틀노래〉 · 〈잡가〉 등이 불려졌는데, 인근 원산 지방의 민요들과 비슷하다.

민속놀이는 함경남도의 다른 고장과 비슷한데 정월 초하루인 설날부터 2월 초하루까지 널뛰기 · 연날리기 · 수수깡이삭 만들어 달기 등을 하며, 특히 2월 초하룻날 장작불 덩어리를 12개 늘어놓고, 검고 흰 빛을 검사하여 일년 중 비가 오고 안 오는 달을 점친다. 5월에는 화전놀이도 한다.

동제로는 3월과 9월에 산신과 지신을 대상으로 하여 제를 올린다. 산신제는 영흥 지방처럼 첫여름 미명(未明)에 각 가정별로 심산유곡의 맑은 시냇물가로 찾아가 흰 쌀밥을 정화수로 정성껏 지어서 산신에게 축원하고 젯밥 약간을 돌 위에 놓고 길상(吉祥)을 빈다.

지신제인 여제(厲祭)는 온 동네가 모여서 봄 · 가을로 지내는데, 제단은 산기슭이나 고목 밑 또는 큰 바위 밑이 되며, 방향은 마을 근처의 서북쪽 제단에 석축을 세우고 지패(紙牌)를 만들어 제를 지낸다. 제수로는 쇠고기 · 돼지고기 등을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장만하며, 제가 끝난 뒤 다른 제찬과 함께 가가호호 골고루 분배하며, 나누어진 음식은 가족 및 가까운 이웃 마을 손님들과 정담을 나누면서 먹는다.

산업 · 교통

전체 경지면적의 77%가 밭이고, 논은 23%에 지나지 않으므로 논농사보다는 밭농사가 주이다. 주요 농산물은 보리 · 밀 · 조 · 콩 · 감자 · 옥수수 · 피 · 수수 · 메밀 등이다.

과수 농사가 성하여 과수원의 총면적이 도내 군 중에서 가장 넓으며, 사과 · 배 · 복숭아 · 포도 등이 산출되는데 그 질이 좋기로도 유명하다. 서부 산악 지대는 상묘(桑苗)와 산림수묘(山林樹苗)의 육성지로도 이름이 나 있으며, 덕원면 내의 낙엽송 묘목은 만주로 수출하기도 한다.

문천군은 해안선이 발달하여 송전만 안의 여러 섬을 근거로 좋은 어장을 형성하고 있으므로 어획량이 많으며 어종도 풍부하다. 어종 중에서도 특히 정어리 · 공미리 · 도루묵 · 해삼 · 우뭇가사리의 어획량이 많다.

그리고 명구면 서만(西灣)을 중심으로 굴 양식이 발달하여 1937년 말 현재 1,317 톤에서 1만 9029㎏의 수확을 올린 바 있으며, 품질도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광산은 운림면의 금 · 은광, 문천면의 무연탄광, 풍하면의 중석광(重石鑛), 천내읍의 석회암광 등이 있다. 해안 일대에 크고 작은 근대식 공장이 설립되어, 그 가운데서도 천내읍의 시멘트 · 제강, 문천면의 연와 · 주물, 덕원면의 유지 · 통조림 · 한천(寒天) · 코크스 · 연와 · 제강, 북성면의 석유 · 주물 · 제련 공업 등이 활발하다.

상업 활동으로는 전탄과 천내에 상설 시장이 개설되어 있고, 옥평 · 풍전 · 신창 · 문평 · 법동 · 거리 시장 등의 5일 정기장이 있다. 거래 품목은 곡물 · 가축 · 짚[藁]제품 · 삼베 · 목탄 · 명주 · 도기 · 토기 · 목기 · 유기(鍮器) 등이다.

교통은 원산을 중심으로 회령 · 평양 · 이천 · 곡산에 이르는 국도가 군의 동부와 서남부를 각각 통과하며, 서북부에 문천∼용포 간의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철도는 함경선이 남북으로 통하고, 지선으로 원산북항선(元山北港線, 10.3㎞) · 천내선(川內線, 4.4㎞) · 경편전철(輕便電鐵, 12㎞)이 부설되어 있다.

한편, 함구미만에 있는 원산북항을 이용한 해운이 활발하여 문천탄광의 무연탄, 천내리의 시멘트 등을 운송하는 데 주요한 구실을 한다.

운림면 직두리의 나무숲과 운림폭포, 봉혈 일대는 자연경관이 매우 아름다우며, 특히 가을 단풍은 볼만하여 찾는 이가 많다. 운림면 직두리에 있는 운림폭포(雲林瀑布)는 높이 24m, 25m인 두 개의 폭포로 전탄강 상류 운림계곡에 있다. 두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굉장하며 주위의 노송과 더불어서 장관을 이룬다.

부근의 국유림에는 전국적으로 희귀한 황양목(黃陽木) 숲이 있고, 그 100여m 앞에는 이른바 봉혈이 있다. 가을에는 단풍이 곱게 들어 찾는 사람이 많다.

읍 · 면

[천내읍 川內邑]

군의 북부에 있는 읍. 면적 145.46㎢, 인구 2만 331명(1944년 현재). 읍 소재지는 장흥리이다. 본래 문천군 초한면(草閑面)과 도사면(都社面)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두 면을 합하여 도초면(都草面)으로 개칭하였으며, 1936년 면의 남부를 문천면에 분할, 편입시켰고, 1943년 천내읍으로 승격하였다.

전탄강이 읍의 북부를 동류하면서 고원군과의 경계를 이루며, 남천강이 읍의 중앙부를 남류하여, 부근에 평야가 발달하였다. 동부에 속고봉과 천불산(天佛山)이 있다.

평야 지대에서는 쌀을 비롯하여 보리 · 콩 · 조 · 피 등이 많이 생산된다. 물방덕리와 화라리에 무연탄광이 있고 천내리에는 석회암광이 있어 이를 바탕으로 조선오노타(朝鮮小野田) 시멘트 회사의 시멘트 공장과 석회 공장이 설립되었고, 북선제강소(北鮮製鋼所)가 건립되어 제강업이 활발하다.

함경선과 국도가 면의 중앙부를 남북으로 통하고 있다.

유적으로는 용담리에 여진 방어를 위하여 고려 초에 축성한 것으로 전해지는 할미석성지(割尾石城址)가 있는데, 일명 ‘한미성지(漢渼城址)’ 또는 ‘한미성지(韓美城址)’라고도 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 기록된 말흘석성지(末屹石城址)로 추정된다. 학포리의 용담약수(龍潭藥水)는 다량의 탄산을 함유하고 용출량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교가 있다.

장흥(長興) · 천내(川內) · 용산(龍山) · 용연(龍淵) · 누익(樓翊) · 가경(加慶) · 신풍(新豊) · 용암(龍巖) · 신평(新坪) · 용당(龍塘) · 물방덕(勿方德) · 화라(禾羅) · 용담(龍潭) · 중양(中陽) · 문왕(問王) · 덕상(德上) · 관사(館仕) · 재인(才仁) · 노흥(蘆興) · 용운(龍雲) · 제위(祭位) · 용천(龍川) · 학포(鶴浦) 등 23개 이가 있다.

[덕원면 德源面]

군의 동남부에 있는 면. 면적 126.91㎢, 인구 1만 2740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상동리이다. 본래 덕원군 부내면(府內面) 지역이었으나, 태조의 선조인 목조(穆祖) · 익조(翼祖) · 도조(度祖) · 환조(桓祖)의 사대어향(四代御鄕)이던 덕원군이 1942년 폐군되면서, 덕원면으로 이름을 바꾸어 문천군에 편입되었다.

동부는 심포천과 적전천(赤田川)이 흘러 그 유역에 평야가 발달하였으며, 서부는 속고산 · 장수봉 · 성치산(城峙山, 1,103m) · 백산(白山, 1,012m) · 송봉덕산(松峰德山, 615m) 등이 있어 산악 지대를 이룬다.

주요 농산물은 쌀과 보리 · 조 · 콩 · 수수 · 감자 등이며, 잡곡과 과일의 산출이 많다. 누에치기가 활발하며 낙엽송 묘목을 육성하여 해외에 수출하기도 한다.

정어리 · 공미리 · 도루묵 · 해삼 · 우뭇가사리의 어획이 많으며, 심포천의 은구어(銀口魚)는 특산물로 유명하다. 문암리의 유지(油脂) · 통조림 · 정어리 착유 등의 수산물 가공업과 관상리의 강관(鋼管) · 철공 · 코크스 공업이 발달하였고, 삼대리에 삼대변전소가 있다.

교통은 함경선과 국도가 면의 동부를 남북으로 통하며 평양∼원산 간의 국도가 면의 중앙을 동서로 가로질러 덕원에서 함경선과 만난다.

유적으로는 의주리에 고려 때 축성한 의주성지가 있고, 영안리장수봉에 명적사, 삼대리에 장림사 등의 사찰이 있으며, 의남리에는 천연기념물인 음나무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교와 그 밖에 신학교 1개교, 농업학교 1개교가 있다.

상동(上洞) · 수변(水邊) · 성외(城外) · 삼월(三越) · 춘성(春城) · 신교(新橋) · 송하(松下) · 방하산(方下山) · 성북(城北) · 의주(宜州) · 의남(宜南) · 석현(石峴) · 상평(上坪) · 삼대(三臺) · 당치(堂峙) · 용암(龍巖) · 고성(古城) · 성남(城南) · 영등(永登) · 영안(永安) · 영강(永康) · 덕산(德山) · 오목(梧木) · 도령(道靈) · 관평(關坪) · 문암(門巖) · 어운(於雲) · 부산(浮山) · 관상(關上) · 풍촌(豊村) · 박천(朴川) 등 31개 이가 있다.

[명구면 明龜面]

군의 북동부에 있는 면. 면적 105.81㎢, 인구 1만 4113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풍전리이다. 본래 명효면(明孝面)과 구산면(龜山面) 지역이었으나, 1936년 두 면을 통합하면서 명구면이라고 하였다.

면의 북부는 전탄강과 용흥강의 복합삼각주로서 저습하며, 서부와 남부는 저산성 구릉지가 섞인 평야를 형성하며, 동부는 두 개의 반도와 세 개의 섬에다 복잡한 해안선을 이룬다.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 조 · 콩 · 수수이며, 사과 · 배 · 복숭아 · 포도 등의 과일 생산과 누에치기도 활발하다.

수산업으로 정어리 · 도루묵 · 공미리 · 연어 · 고등어 · 미역 · 게 등의 어획 및 채취가 많으며, 특히 서만내의 굴 양식이 유명하고 교양리와 마산리의 제염업이 성하다.

문천 · 전탄 고원과 통하는 지방도로가 있으며, 영흥만 정기 연락선을 이용한 수상 교통으로 수산물을 출하한다.

유적으로는 성저리에 고려 초에 축성한 것으로 전하는 금성성지가 있고, 귀종리천보산 아래 고려 시대에 지은 청련사(靑蓮寺)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4개교와 그 밖에 문천감화원이라고도 하는 영흥학교가 있다.

풍전(豊田) · 신율(新栗) · 장흥(長興) · 대덕(大德) · 명우(明友) · 신풍(新豊) · 백산(白山) · 도룡(圖龍) · 어류(於柳) · 원당(元塘) · 석전(石田) · 무우실(無憂實) · 청어미(靑魚0x9648) · 유미(柳0x9648) · 방고개(方古介) · 답촌(畓村) · 어항(魚項) · 방미(方0x9648) · 어은미(魚隱0x9648) · 지부미(地富0x9648) · 풍무(豊武) · 간송(間松) · 반좌(磻佐) · 추미(楸0x9648) · 송전(松田) · 구부안(駈富岸) · 오산(五山) · 수치(秀峙) · 용암(龍巖) · 내양(內陽) · 상평(上坪) · 당북(塘北) · 귀종(歸宗) · 생포(生浦) · 반암(班巖) · 신흥(新興) · 신천(新川) · 신안(新安) · 장발(長發) · 한포(鷳浦) · 금호(錦湖) · 덕치(德峙) · 성저(城底) · 주산(主山) · 황죽(黃竹) · 귀포(歸浦) · 송전(松田) · 아치관(牙致串) · 당치(堂峙) · 왕호(王湖) · 평방(坪坊) · 안흥(安興) · 논금(論錦) · 향교판(鄕校板) · 양지(陽地) · 마산(馬山) · 신양(新陽) · 교양(橋陽) · 서원(書院) · 석흥(石興) · 청어포(靑魚浦) · 낙동(洛洞) · 섬호(蟾湖) 등 63개 이가 있다.

[문천면 文川面]

군의 중앙부에 있는 면. 면적 112.29㎢(1935년 현재), 인구 1만 1861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옥평리이다. 본래 군내면(郡內面)이라고 하였으며 1922년 남산리의 군청이 옥평리로 옮겨 왔다.

1936년 도초면의 남부 15개 동리를 분할, 편입하면서 문천면으로 개칭하였으며, 1943년 군청은 천내리로 이전하였다. 면의 남부에 속고산(速高山, 722m), 장수봉 및 마식령과 응봉산의 능선이 뻗어 있고, 서쪽 경계에는 연대봉(蓮臺峰)이 있어, 면의 서부와 남부는 대부분 높은 산지를 이루고 있다.

북동부에는 남천강이 면의 중앙을 북동류하면서 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쌀 이외 보리 · 콩 · 조 · 수수 · 피 등의 잡곡 생산이 많으며, 배 · 포도 · 사과 · 복숭아 등의 재배를 비롯하여 누에치기도 성하다.

또한, 견직물을 생산하는 명주기업(明紬機業)과, 옥평리의 벽돌, 송치리의 옹기, 장평리의 주물(鑄物) 등 공업이 활발하다.

함경선과 국도가 면의 동북단을 지나고 원산북항선이 문천에서 갈라지며, 운림면 신창―문천―북성면 옥성 등을 잇는 지방도로가 있다.

유적으로는 989년 옥녀봉에 축성하였다는 고이균성지가 있으며, 능전리에는 조선태조의 증조부 익조의 비 정숙왕후 최씨(貞淑王后崔氏) 능인 숙릉이 있고, 성저리에는 고려 시대 석불이 있다.

경승지로 옥평리에 옥녀봉이 있어, 옥평리 전경과 문천평야 및 영흥만의 창해(蒼海)까지도 바라볼 수 있다.

도창리에는 도창사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교가 있다.

옥평(玉坪) · 문양(文陽) · 초전(草田) · 영로(營老) · 성저(城底) · 교월(矯越) · 수침(水砧) · 유정(柳亭) · 미양(眉陽) · 남산(南山) · 남양(南陽) · 당하(堂下) · 성북(城北) · 반계(磻溪) · 장평(長坪) · 부거(富居) · 만포(晩浦) · 자방(自方) · 지산(智山) · 영상(嶺上) · 도창(道昌) · 송치(松峙) · 주교(舟橋) · 석현(石峴) · 당모로(堂毛老) · 문봉(文峰) · 용정(龍井) · 문창(文昌) · 보목정(補木亭) · 서재(書齋) · 대성(大成) · 봉오(鳳梧) · 능전(陵前) · 육상(陸上) · 함평(咸平) · 원평(元坪) 등 36개 이가 있다.

[북성면 北城面]

군의 동부에 있는 면. 면적 48.91㎢, 인구 2만 1137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문평리이다. 본래 덕원군 용성면(龍城面) 지역으로 옛날에는 호포라고 하였으며, 1459년(세조 5)에 남북으로 분할된 의주군(宜州郡) 용진현(龍津縣)의 남부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주북면(州北面)의 일부를 병합하여 북성면으로 이름을 개칭하였고, 1942년 덕원면이 폐지되면서 문천군에 편입되었다.

동해안의 영흥만에 인접한 해안선은 단순하며, 서남단에 속고산의 능선이 뻗어 있고, 남부에 망덕산(望德山), 북부에 황석산(黃石山)이 있어 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천강이 면의 북부를 동류하여 영흥만으로 흘러들고, 장수봉에서 발원한 몽월천(蒙月川)이 문평리를 거쳐 영흥만으로 유입하여, 그 유역의 평야는 토지가 비옥하고 수리 시설이 편리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과 보리 · 조 · 콩 · 수수 등이 생산되며, 사과 · 배 등의 과일 재배도 활발하다. 해안에서는 정어리 · 도루묵 · 공미리 · 연어 · 고등어 · 굴 · 미역 등의 어획 및 채취가 많고, 남천강의 은구어는 특산물로 유명하다.

한편, 일제 강점기에는 농업 이외에도 천내읍 · 풍하면 · 풍상면 · 운림면의 풍부한 지하자원과 편리한 교통 시설을 이용하여 원산항에 인접한 군수공업 지대로 발전하였다. 주요 공업 시설로 문평리의 석유 유조소, 수달리의 제련소 · 산소공장 · 주물공장, 야태리의 경금속공장 등이 있다.

함경선과 국도가 면의 중앙을 관통하고, 문천∼신안리 간의 원산북항선이 북부를 통과하고 있다.

유적으로 망덕산에 철관성지가 있는데 둘레 425m의 석축으로, 1364년(공민왕 13) 이성계가 이곳에서 여진족을 대패시켰다고 한다. 용진리의 고성지는 둘레 910m, 높이 1.5m로 1006년(목종 9) 여진족을 방어하기 위하여 축성한 것이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문평(文坪) · 송탄(松灘) · 옥정(玉井) · 용평(龍坪) · 황석(黃石) · 사흘천(沙屹川) · 용진(龍津) · 신흥(新興) · 신안(新安) · 신성(新成) · 고암(庫巖) · 운성(雲城) · 휘후(揮厚) · 가평(柯坪) · 염중(鹽中) · 염동(鹽洞) · 야태(野汰) · 수달(秀達) 등 18개 이가 있다.

[운림면 雲林面]

군의 서북부에 있는 면. 면적 251.71㎢, 인구 8,945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신창리이다. 동쪽에 연대봉 · 응봉산, 서쪽에 학암산(鶴巖山) · 막등산(幕登山, 928m) · 철덕산(鐵德山, 1,111m), 남쪽에 두류산 · 달악산(達嶽山, 1,002m) 등이 있어 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 면은 대부분 산악 지대이지만, 전탄강이 면의 중앙을 북류하면서 북부에 곡저평야를 형성한다.

산지가 많아 주로 보리 · 조 · 콩 · 피 · 수수 등의 잡곡을 생산하며, 사과 · 배 · 복숭아 · 포도 등의 과수를 재배하며 양잠도 활발하다.

직두리에 금 · 은광인 가은광산(佳銀鑛山)이 있고, 신풍리에는 문천무연탄광이 있다. 교통은 풍상면 용포리에서 평양∼원산 간 도로와 접속하는 문천∼용포 간의 2등도로가 있다.

신창리성치(城峙) 산정에 1015년(현종 6)에 축성한 둘레 367.2m, 높이 3.6m의 운림진석성지가 있다. 경승지로는 두류산이 유명하며, 종유석과 석순이 있는 동룡굴(蝀龍窟) 같은 동굴이 많은 인흥령(仁興嶺)과 운림폭포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신창(新倉) · 용암(龍巖) · 장흥(長興) · 방고개(方古介) · 어은(於隱) · 신풍(新豊) · 회복(會福) · 덕평(德坪) · 구덕(龜德) · 월은(月隱) · 영전(嶺前) · 쟁경(爭境) · 마한(馬汗) · 직두(直頭) · 상평(上坪) · 동봉(東鳳) · 수한(水閑) · 중덕(仲德) · 금덕(金德) · 가목정(柯木亭) · 인흥(仁興) · 철산(鐵山) · 응봉(鷹峰) 등 23개 이가 있다.

[풍상면 豊上面]

군의 남부에 있는 면. 면적 299.70㎢, 인구 1만 1110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마전리이다. 이 면은 원래 안변군(安邊郡) 영풍면(永豊面)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풍상 · 풍하의 두 면으로 분할되어 덕원군에 편입되었다가, 1942년 덕원군이 문천군에 병합됨과 동시에 문천군에 속하게 되었다.

낭림산맥의 줄기에 있으며, 동으로는 이덕산, 서로는 가사산과 덕곡산(德谷山, 1,207m), 북으로는 두류산 · 달악산 · 성치산 등의 고산준령이 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임진강과 그 지류들이 면의 중앙부를 관통하여 남류하는 임진강 상류 지역이다. 면 전체가 산악 지대이므로 조 · 피 · 수수 · 콩 등의 잡곡을 주로 생산하며, 지하자원으로는 서흥리에 자철광(磁鐵鑛)이 있다.

원산∼평양 간의 도로가 면의 북부를 지나며, 원산∼이천을 잇는 지방도로가 마전에서 분기한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마전(馬轉) · 영저(嶺底) · 수침(水砧) · 금동(金洞) · 도찬(道贊) · 방하(方下) · 도념(道念) · 유동(裕洞) · 동산(東山) · 억동(億洞) · 복회(伏回) · 감산(甘山) · 거(巨) · 구미(九味) · 내동(內洞) · 작동(鵲洞) · 마식(馬息) · 노동(蘆洞) · 용포(龍浦) · 감둔(甘屯) · 하서(下西) · 상서(上西) · 서흥(西興) 등 23개 이가 있다.

[풍하면 豊下面]

군의 서남단에 있는 면. 면적 289.86㎢, 인구 1만 815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법동리이다. 이 면은 원래 안변군 영풍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풍상 · 풍하의 두 면으로 분할되어 덕원군에 편입되었다가, 1942년 덕원군이 문천군에 병합됨과 동시에 문천군에 속하게 되었다.

면 전체는 낭림산맥의 줄기를 따라 남북으로 긴 지형이며, 동쪽에 맹이덕산 · 봉황산, 서쪽에 육판덕산 · 동백년산(東百年山, 1,246m), 북쪽에 만년덕(萬年德, 1,274m) · 이덕산 · 가사산 등의 준령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임진강이 면의 중앙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임진강 상류 유역으로 하천 계곡을 중심으로 취락이 형성되어 있다. 원시림이 많아 임산자원이 풍부하나, 운반이 불편하여 화전 경작이 많다.

주로 경사지에 감자 · 귀리 · 대마 · 조 등을 재배하며, 광공업으로는 상취암리에 중석광인 풍력광산(豊力鑛山), 하취암리에 대강백년광산(大鋼百年鑛山)과 조선광업진흥광산 등이 있다.

도로망은 원산∼이천을 잇는 2등 도로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지나며, 법동∼문암 간의 도로가 서부를 가로지르고 있다.

명승지로 청계리에 청계약수와 식염성 탄산천인 청계온천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법동(法洞) · 원산(元山) · 여해(汝海) · 율동(栗洞) · 석천(石泉) · 장안(長安) · 고련(古蓮) · 종포(從浦) · 어유지(魚遊池) · 금구(金龜) · 노탄(蘆灘) · 청계(淸溪) · 봉황산(鳳凰山) · 내백일(內白日) · 외백일(外白日) · 내고읍(內古邑) · 외고읍(外古邑) · 산저(山底) · 동화(東化) · 병암(屛巖) · 백안(白岸) · 상취암(上鷲巖) · 하취암(下鷲巖) 등 23개 이가 있다.

광복 후 변천

1945년 광복 당시에는 함경남도에 속하였으나, 1946년 9월 북한 공산 치하에서 강원도에 편입되었다. 1952년 12월 문천군 풍상면 · 풍하면이 법동군에, 1961년 11월 부운리 · 석현리 · 덕원리 · 장점리 등이 원산시에 편입되었으며, 1976년 6월 원산시 일부가 분리되어 문천군에 편입되었다. 1991년 7월 시로 승격되었다.→문천시

참고문헌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함경남도지』(함경남도지편찬위원회, 1968)
『북한문화재실태와 현황』(문화재관리국, 1985)
『문천군지』(문천군지편찬위원회,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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