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거창(居昌). 몽고의 끈질긴 출륙요구에 대한 부응조치로서 1250년(고종 37) 강화도 승천부(昇天府)의 임해원(臨海院) 구지(舊址)에 궁궐을 조영하게 되자, 장군으로서 대장군 이세재(李世材)와 함께 역사를 주관하였다. 그 뒤 대장군(大將軍)에 올랐으며, 1256년에는 나주에 내려가 몽고의 침략군 사령관인 자랄타이[車羅大]와 화의조건을 협의하기도 하였다.
1258년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재임 중 몽고군의 침략을 받아, 소관지역인 고주(高州) · 화주(和州) · 정주(定州) · 장주(長州) · 의주(宜州) · 문주(文州) 등 15주 백성을 이끌고 인근 섬에 입보(入保)하였다. 처음 저도(猪島)로 들어갔으나 중과부적으로 좀더 작은 죽도(竹島)로 옮겼다. 그러나 백성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 채 조휘(趙暉)와 탁청(卓靑)의 반란으로 등주부사(登州副使) 김선보(金宣甫)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