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시 ()

원산지도
원산지도
인문지리
지명
함경남도 남부의 영흥만에 위치한 항구도시. 북동쪽에는 호도반도(虎島半島)가 길게 뻗어 송전만(松田灣)을 둘러싸고 있고, 남동쪽은 갈마반도(葛麻半島)가 돌출해 덕원만(德源灣)을 형성하며, 북서쪽은 문천군, 남서쪽은 안변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7°12′∼127°32′, 북위 39°06′∼39°16′에 위치하며, 면적 126.1㎢, 인구 12만3443명(1945년 현재)이다.
정의
함경남도 남부의 영흥만에 위치한 항구도시. 북동쪽에는 호도반도(虎島半島)가 길게 뻗어 송전만(松田灣)을 둘러싸고 있고, 남동쪽은 갈마반도(葛麻半島)가 돌출해 덕원만(德源灣)을 형성하며, 북서쪽은 문천군, 남서쪽은 안변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7°12′∼127°32′, 북위 39°06′∼39°16′에 위치하며, 면적 126.1㎢, 인구 12만3443명(1945년 현재)이다.
자연환경

마식령산맥의 지맥들이 영흥만 쪽으로 점차 낮아지면서 구릉성 산지를 이루어 시루봉[甑峰]·장덕산(長德山)·여왕봉(女王峰) 등의 낮은 산지와 적전천(赤田川)이 있으며, 남쪽은 산기천(山岐川)을 건너 안변평야(安邊平野)로 이어진다.

영흥만 안팎으로 크고 작은 20여 개의 섬이 있다. 대표적인 섬으로 신도(薪島)·송도(松島)·웅도(熊島)·여도(麗島)·황토도(黃土島)·장덕도(長德島) 등이 있는데, 이들은 갈마반도와 더불어 원산항의 자연적인 방파제 구실을 한다.

이에 따라 항내(港內)는 물결이 잔잔하고 수심이 8∼13m에 불과하며, 간만의 차는 1m 이하로 우리 나라는 물론 동양에서도 손꼽히는 좋은 항구이다. 토양은 식질양토와 양토 및 식양토이며, 지질은 화강편마암과 결정편마암으로 되어 있고 서쪽의 여왕봉 일대는 조선계 대석회암통의 석회암이 분포한다.

기후는 배후의 낭림산맥과 마식령산맥이 북서풍의 차가운 기류를 막아 주며, 한편 바다의 난류로 말미암아 같은 위도상에 있는 평양에 비해 온화하다. 연평균기온 11℃, 1월 평균기온 -13.5℃, 8월 평균기온 22℃이며, 연강수량은 1,400㎜로 다우지역이다. 첫서리는 10월 23일경에 내린다.

역사

[고 대]

중평동에서 신석기시대의 토기와 청동기시대의 유물포함층이 발견되어 신석기시대부터는 이곳에 사람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시대에는 어을매(於乙買) 또는 천정군(泉井郡)이라고 하다가, 681년(신문왕 1)신라 영토로 편입되어 정천군(井泉郡)으로 개칭되었다.

[고 려]

태조는 건국 후 곧 동북경 방면의 개척에 힘써 고려 영토로 편입했고, 정천군을 용주(湧州)로 개칭하였다. 995년(성종 14) 용주에 방어사를 두었다가 뒤에 의주(宜州)로 개칭했으며, 1108년(예종 3) 이곳에 성을 쌓았다.

1258년(고종 45) 원나라가 영흥 이북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자 정주 이남, 안변 이북의 땅이 모두 원나라에 몰입되었고, 1356년(공민왕 5) 공민왕이 화주 이북의 땅을 수복했을 때 의주도 수복되었다.

[조 선]

1413년(태종 13)의주는 의천군(宜川郡)으로 개칭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1432년(세종 14) 호구는 303호, 850명이었다. 군사체제는 지군사(知郡事)가 영흥도좌익병마(永興道左翼兵馬)를 겸하고 군정은 익속군(翼屬軍) 70명, 강군(舡軍) 80명, 수성군(守城軍) 5명을 두었다.

1437년덕원부(德源府)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445년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 4대의 어향(御鄕)이라 해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관원은 도호부사·교수 각 1명이 있었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가토(加藤淸正)가 함경도를 침공했을 때 이곳도 큰 피해를 입었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 때는 청군의 일부인 몽고군이 함경도를 거쳐 철수함으로써 덕원부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여지도서 輿地圖書》에 따르면, 1759년(영조 35) 방리는 현사(縣社)·적전사(赤田社)·부내사(府內社)·북면사(北面社)·용성사(龍城社)의 5사로 이루어지고 호구는 2,080호, 8,236명이었다.

[근 대]

1895년 지방관제를 개혁해 부군제를 실시할 때 덕원군으로 개편되어 함흥부에 속하였다. 1896년 전국을 13도로 개편할 때 함경남도 덕원군이 되었다. 원래 원산시의 전신인 원산진(元山津)은 영흥만에 위치한 덕원부의 작은 어촌이었다. 러시아 군함이 원산진 앞바다에 정박해 조선 정부에 통상과 거주지를 요구하다가 대원군의 거절로 돌아간 일이 있다.

1878년 4월 일본 군함이 영흥만에 들어와 덕원연안을 측량했고, 다음 해 일본의 요구로 〈원산개항예약 元山開港豫約〉 7조를 의정하였다. 이에 따라 1880년 7월 정식으로 개항해 일본영사관이 설치되고 일본인이 살기 시작하였다. 1889년 11월에 일어난 원산방곡령사건은 일본의 침략과 횡포에 대한 배일감정이 노골화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을사조약 후 원산에 이사청(理事廳)이 설치되고 일본인 거류민단이 조직되면서 일본인 거주자가 급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양적으로 팽창하는 일본인에 대항하기 위해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으로 원산학사(元山學舍)가 세워졌다. 8·29국난 직후에 덕원군을 원산부로 승격, 개칭했다가 1914년 3월 행정구역 개편 때 원산부의 대부분이 덕원군으로 복귀하고 일부분이 원산부로 개편되었다.

1914년 8월경원선이 개통되어 원산항의 교통·운수에 획기적인 발달을 가져왔으며, 동해안의 풍부한 수산물을 비롯해 농산물·광산물 등을 쉽게 서울로 운송할 수 있게 되었다. 1927년 동해안을 따라서 안변∼양양간의 동해북부선, 1928년함경선, 1941년 원산을 기점으로 동해안과 서해안을 연결하는 평원선이 각각 개통됨으로써 관북교통의 요충지가 되었다.

1936년 말의 호구는 1만3210호, 6만1772명이며 그 중 일본인이 전체 인구의 0.18%를 차지해 일본인이 급속도로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원산부의 인구 증가는 유리한 지리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상공업·수산업이 눈부시게 발전함에 따라 각지에서 인구가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1942년 4월 덕원군을 폐하고 그 북부지역을 문천군에, 적일면·현면을 원산부에 편입하였다. 1943년 호구가 2만3951호, 12만3444명에 달하는 큰 도시로 팽창하였다. 원산은 무역도시로서의 발전은 괄목할 만했으나 공업계는 부진한 상태였다가 만주사변 후 대륙침략의 전진기지로서 대규모의 공장이 잇달아 들어서게 되었다.

3·1운동 때는 3월 1일 이곳 상시장(上市場)에 기독교인·천도교인 등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 격렬한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집회횟수 7회, 집회인수 2,500명, 부상자수 21명, 피검자수 91명이었다. 1929년 1월에는 남상옥(南相沃) 등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원산자유노동조합의 부두노동자 총파업에 각급 학교가 궐기해 시위를 벌이다가 많은 희생자를 내기도 하였다.

유물ㆍ유적

중평동에서 1953∼1957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산포지역이 발굴되었다. 용주동에는 조선왕조의 첫 기틀을 다진 곳이라고 해 함경도관찰사 정민시(鄭民始)가 조정의 명을 받아 건립한, 태조의 증조부 익조의 탄생지에 세운 성허지비각(聖墟之碑閣)이 있다.

성라동과 안변 남대천 하구와 접하는 구릉 위에는 고려 현종 연간에 축성했다는 진명성(鎭溟城)터가 있다. 중청동 산정에는 발산봉수대(拔山烽燧臺)를 비롯해 여러 개의 봉수지가 있으며, 산정 주변에는 크고 작은 성지와 성곽들이 산맥을 따라 도처에 산재해 있다.

그 밖에 당중동에는 안양사(安養寺)터가 있으며, 성라동에는 이성계(李成桂)의 소년시절 승마단련장이었던 치마대(馳馬臺) 등이 있다. 또 안변군과의 경계인 와우동 계곡에는 조선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능인 고릉(古陵)이 있으며, 덕원과 경계를 이루는 곳에는 장림사(長林寺)·무달사(武達寺) 등이 있다.

교육ㆍ문화

원산은 개항되기 이전까지 덕원군에 소속된 지역이었는데, 덕원에 향교가 생긴 것은 조선 초기로 부사 1명과 교수 1명이 배정되었다. 서당을 거쳐 향교로 모인 청소년들은 주로 사서오경을 배우고 서울의 사학(四學)으로 진출해 과거시험에 대비하였다. 1695년(숙종 21)에 용진서원(龍津書院)이 설립되었다.

개항 직후 일본인이 원산으로 많이 진출함에 따라 신교육이 일찍부터 활발해졌다. 1926년 원산에는 용동의 제일공립보통학교, 신흥동의 제이공립보통학교가 있었고, 사립학교로는 기독교에서 경영하는 보광중학교(保光中學校)와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 및 진성학교(進誠學校)·해성학교(海星學校)·광명학교(光明學校) 등이 있어 사학의 융성을 말해 준다.

광복 직전에는 중등교육기관으로 일본인과 함께 공부하던 원산간이상업학교가 있었는데 뒤에 원산상업학교로 승격되었고, 원산여자사범학교가 생겼다. 한국여성을 교육하던 명성 높은 교육기관은 루씨여학교가 유일한 중등학교였다. 그리고 일본인만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원산중학교와 원산고등여학교가 있었다.

초등교육기관으로는 용동(龍洞)·명석(銘石)·덕성(德成)·갈마(葛麻)·길명(吉明)·적전(赤田)·송정(松汀) 등의 공립 국민학교와 해성(海星)·명성(明星)·광명(光明)·배성(培誠)·취성(聚星) 등의 사립 국민학교가 있었다.

해성은 기독교 계통이며, 루씨사립여자국민학교와 진성사립여자국민학교는 기독교 계통의 여자만의 국민학교였고, 원산여자사범부속국민학교는 공립의 여자 국민학교였다. 종교는 천주교와 개신교가 주종을 이루는데, 덕원에 가톨릭교구와 수도원이 있어 원산시에도 성당이 많으며 교회와 신자 또한 많다.

이 고장은 항구와 바다에 면해 있어서 설화가 많이 전해진다. 그 중 대표적인 〈영흥만연기설화〉는 다음과 같다. 태초에 백두산에 살던 호랑이가 굶주리다 못해 마천령 위에서 바라보니 낭림산 산중에는 곰·이리·돼지·말·노루·토끼 등 온갖 짐승들이 오순도순 살고 있었다. 군침이 돈 호랑이가 으르릉 하고 개마고원에 앞발을 내딛는 순간 혼비백산한 짐승들은 그만 엉겁결에 동해 바닷물로 뛰어들었다.

배가 고픈 호랑이는 물속도 불사하고 따라 들어갔다. 동물들은 결사적으로 헤엄쳐 달아나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백두산 산신령은 안타까웠다. 동물들이 살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가여워 그만 오른손을 내밀어 호랑이의 꼬리를 움켜잡았다.

호랑이는 꼬리를 잡힌 채 늘어나면서 물속에 영원히 잠겨 버렸다. 동시에 호랑이는 꼬리부분이 잘록하게 빠지다 말아서 범섬, 즉 호도(虎島)가 되고, 헤엄 잘 치는 곰은 멀리 도망가서 웅도가 되었으며, 말은 여도(麗島)에, 토끼는 모도에 숨고, 큰 돼지와 작은 돼지는 마을 근처로 피난해 육지와는 가장 가까운 대저도(大猪島)와 소저도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원산항과 영흥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설화는 지리·풍토 등 자연의 묘리와 인간의 삶을 표현한 것이다. 이 밖에도 〈용주리전설〉·〈유석이야기〉 등이 전한다.

이곳에 일본인 거류민이 살기 시작한 뒤부터 우리의 민요도 차츰 빛을 잃어 갔고 고유한 문화나 생활도 일본 상가풍속으로 바뀌어 갔다. 대표적인 민요로는 〈명사십리〉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명사십리에 해당화야/꽃이 진다고 설워를 마라/잎이 진다고 설워를 마라/동삼(冬三) 석달을 꼭 죽었다가/명춘 삼월에 또다시 오마.”

그리고 술집이 많은 원산에는 역시 ‘먹고 노세’조의 민요가 많았다. 다만 잡가라 해 꽤나 풍류스러운 민요가 상류사회에서 유행하였다. “강초(江草) 일월에 환수생/강물만 푸르러도 낭군 생각이라/건곤불로 월장재하니/적막강산 금(今)백년이라/청산만리 일고주하니/배를 타고 선유나 할꺼나….” 이것은 현실도피적이요 남녀 상열적인 노래라 하겠다.

이곳에서 흥겹게 지내는 명절이 단오와 칠석인데 이 때 즐겨 부르는 노래는 〈단오요〉와 〈칠석요〉이다. 〈단오요〉는 “오월이라 단옷날은 천중가절 아니냐/수양청청 버들숲에 꾀꼬리는 노래하네/휘여청청 버들가지 저가지를 툭툭차자/휘여청청 버들가지 청실홍실 그네매고/임과 나와 올려뛰니 떨어질까 염려로다/휘여청청 버들가지 저가지를 툭툭차자…”와 같고, 〈칠석요〉는 “애야애야 애야 좋네/칠석놀이 좀더 좋네”라는 후렴으로 끝나는 연속체의 민요이다. 이 밖에 〈어랑타령〉이 다른 고장보다 구성지다.

민속놀이로는 단오놀이가 으뜸이다. 기후가 온화하며 물이 맑고 녹음이 싱그러운 이 고장의 여자들은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삼단 같은 머리채를 드리우고는 그네뛰기를 하며, 남자들은 다른 고장과 같이 씨름을 한다.

산업ㆍ교통

어느 정도 농경지가 있으나 비교적 과수원이 많은 편이며, 주로 사과·배·복숭아·포도 등이 많이 생산된다. 쌀은 인접한 함흥평야와 안변평야에서 대량으로 산출되어 한때는 관북지방의 관문인 원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많이 수출되었다.

원산항은 〈한일수교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개항된 항구로 관북·관서지방의 수출입무역항으로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 주된 수출입품목은 곡물류·수산물·광물·기계류·피혁·인삼·도자기·목재 등이다.

원산 앞바다는 한류와 난류의 교차가 심하고 플랑크톤이 풍부해 한때 전국에서 가장 높은 어획량을 자랑하기도 하였다. 특히 명태가 손꼽히며, 그 밖에 고등어·삼치·방어·게 등이 유명하다. 공업은 1930년대 후반부터 조선석유공장이 건립되면서 대규모의 조선·철공·기계·식품·수산물가공업 공장들이 건립되어 활발하다. 〈趙東奎〉

시장으로는 1921년 조선총독부 조사에 따르면, 원산부에는 원산수정공설시장·원산가축시장·제1어시장·제2어시장·상시장·하시장 등이 있었으며, 주요 거래품목은 농산물·수산물·식료품·잡화·가축·공산품 등이었다.

그 뒤 시장의 명칭이 바뀌었으며, 정기시장으로는 명석동의 신탄(나무)장이 매일 열리고, 양촌동의 양촌장과 가축시장은 5·10일에 개시되며, 해안통에서 5·10일에 열리는 해안통장에서는 주로 수산물이 거래된다.

교통은 철도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육로교통보다 해상교통이 더 발달하였다. 그러나 1914년 경원선의 개통과 함께 육로교통이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뒤를 이어 함경선, 원산을 기점으로 해 동해와 황해를 연결하는 평원선 등이 개통되면서 육로와 해상교통의 요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명승지로는 해당화로 유명한 명사십리(明沙十里)와 송도원해수욕장이 있다. 송도원해수욕장은 원산시가지의 북쪽 약 3㎞ 지점에 영흥만을 동으로 접하고 있다. 물결이 잔잔하고 맑을 뿐 아니라 백사장에 아름드리 노송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별장과 해수욕장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여름철이면 원산시내 중등학교 학생들의 수영장으로 이용될 뿐 아니라, 멀리 서울로부터 피서객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룬다.

원산시(북한)

강원도(북한) 북부 원산만 연안에 있는 시. 강원도의 도 소재지이며, 서쪽은 법동군, 남쪽은 안변군, 북쪽은 문천시, 동쪽은 동해에 면해 있다. 동경 127°16'∼127°32', 북위 39°05'∼39°12'에 위치하며, 인구 32만5900여 명(1996년 추정)이다.

본래 함경남도에 속했으나 1946년 9월 북한 관할 북부 강원도로 편입, 이관되면서 도 소재지가 되었다. 1961년 3월 송화동·중동·용교동·포하동이 폐지되고, 봉춘동·해방동·원석동·삼봉동·남산동·율동·덕산동·복막동이 신설되었으며, 장흥리를 장흥동으로 개칭하였다.

1961년 12월 문천군의 부운리·덕원리·석원리·장림리를 편입시켰다. 1967년 7월 철산동·춘성동·장덕동·부운리를 폐지하고 해방동은 해방1·2동으로 분리하였다. 1972년 문천군의 문천읍과 가은노동자구, 그리고 16개 이가 편입되었으며, 문천읍이 문천·성문노동자구로 개편되었다.

1974년 1월 노동자구를 모두 동으로 개칭했고, 1974년 5월에는 천내군의 석전리·덕흥리가 편입되었다. 1976년 19개 이·동이 다시 문천군으로 이관되었으며 1982년 10월에는 장산동·탑동이 신설되면서 초하동·장흥동·고능동·덕원리가 폐지되었다.

행정구역은 관풍(館豊)·탑·신풍(新豊)·율·와우(臥牛)·덕성(德成)·평화(平和)·해방1(解放一)·해방2·양지(陽地)·송흥(松興)·봉춘(鳳春)·개선(凱旋)·승리(勝利)·봉수(鳳水)·석우(石隅)·원석(原石)·명석(銘石)·상(上)·광석(廣石)·산제(山祭)·중청(中淸)·삼봉(三峰)·원남(元南)·신흥(新興)·해안(海岸)·남산(南山)·장촌(場村)·용하(龍下)·갈마(葛麻)·내원산(內元山)·방하산(訪霞山)·장산·복막(福幕)·여도(麗島)·적천(赤川)·송천(松川)·세길 등 38개 동, 용천(龍川)·현동(現洞)·춘산(春山)·낙수(洛水)·삼태(三泰)·중평(中坪)·석현(石峴)·장림(長林)·영삼(永三)·신성(新城)·죽산(竹山)·수상·칠봉·남천·상자 등 15개 이로 되어 있다.

[자연환경]

이 군은 대부분의 지역이 구릉과 저산성 지대로 되어 있다. 서쪽에는 마식령산맥이 뻗어 있고 여기에 마식령(768m)·성재(1,102m)·고춘봉(1,124m)·백산(772m) 등이 솟아 있으며, 동쪽으로 갈수록 점차 낮아져 구릉지대를 이룬다.

시내에는 적전천·장림천·갈마천·포하천 등 소규모 하천들이 동해방향으로 흐른다. 동쪽의 원산만은 해안선이 비교적 단조로우나 갈마반도가 뻗어 있고, 앞바다에는 여도·신도·소도·대도 등의 작은 섬들이 산재해 있다.

기반암은 화강편마암·화강암·석회암 등이며, 토양은 갈색산림토가 넓게 분포되어 있고 하천유역에 충적토가 발달되었다. 기후는 온화한 편으로 일조량이 비교적 많고 안개일수가 극히 적다. 연평균기온 10.4℃, 1월 평균기온 -3.4℃, 8월 평균기온 23.2℃이며 연평균강수량은 1,400㎜로 많은 편이다. 첫서리는 10월 24일경, 마감서리는 4월 8일경에 내린다.

산림은 시면적의 65%이며 주로 소나무와 참나무림이고, 잣나무·전나무·가래나무·단풍나무 등이 섞여 있다. 바닷가 백사장에는 소나무림이 펼쳐져 있다. 북서쪽 산지에는 산과일·산재·약초들이 생장하고 멧돼지·노루·오소리·산토끼·다람쥐·꿩 등의 야생동물이 서식한다. 송천동에는 희귀식물로 알려진 칠엽나무와 튤립나무가 있다.

[산업·교통]

농업은 쌀 등의 곡물을 생산하며, 현동·송천·중평 협동농장에서는 현대식 야채재배를 전문화해 배추·무·시금치·오이·가지 등 각종 야채를 재배한다. 과수는 사과·배·감을 위주로 대추·살구·추리나무를 기르며, 원산호두농장에서는 호두나무를 전문적으로 가꾼다. 축산은 닭과 돼지를 기본으로 소·염소·토끼 등을 사육해 육류·우유·계란을 공급하며, 누에고치도 많이 친다.

원산은 북한지역의 주요 수산업기지의 하나로 원산수산사업소를 비롯해 여러 개의 수산협동조합과 양식사업소가 있어 원양어업과 함께 근해 중소어업이 발전하고 있다. 주요 수산물은 명태·가자미·청어·굴·해삼·미역·다시마 등이다.

공업은 강원도 최대의 공업지역으로 수송기계·농기계·조선공업이 발달하였다. 중공업 부문에서는 1만t급 대형 선박을 건조하는 원산조선소, 북한지역 최대의 화차생산공장으로서 60t급 화차·125t급 하개식 화차·유조차·시멘트차·냉동차 등 특수차량을 제작하는 6·4차량연합기업소와 충성트랙터공장·원산기계공장·문평제련소·원산화학공장·원산합성고무공장·원산판유리공장·원산전산공장 등이 있다. 경공업 부문에서는 방직공장·피복공장·견직공장·편직공장·양말공장·신발공장이 있으며, 식료품가공공장인 원산곡산공장과 원산맥주공장 등이 있다.

교통은 강원선(고원∼평강)이 통과하며, 원산∼금강산간에도 철도가 건설되고 있다. 원산시를 중심으로 평양과 금강산간에는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있으며, 그 밖에 함흥·통천·고성·고산 등 인접 시·군과 연결되는 도로망이 발달해 있다.

원산항은 고성을 비롯해 동해안의 화물 및 여객을 운반하는 항로가 개설되어 있으며, 국제무역항으로서 1만t급 선박 3척이 동시에 접안 가능하고 1일 하역능력은 2만t에 달한다. 일본을 출입하는 만경호도 원산항에서 출항한다.

[교육·문화]

원산시는 북한 최대의 관광권인 금강산권에 인접해 있어 국제적 관광지로 개발되고 있다. 명사십리해수욕장·송도원유원지·송도원국제관광호텔·송도원국제소년야영소가 있으며, 명사십리는 북한천연기념물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다. 유적으로는 영삼리 속고산에 1771년(영조 47)에 창건한 명적사가 현존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원산농업대학·동해수산대학·원산공업대학·송도원의학대학·정준택경제대학·이수덕교원대학·원산제1·2사범대학과 공장대학 등 10개의 대학이 있으며, 70여 개의 각급학교가 있다. 시의 중심 광장에는 원산청년회관이 있고 원산경기장이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經國大典」
「新增東國輿地勝覽」
「德源邑誌」
「元山市史」(元山市史編纂委員會, 1968)
「咸鏡南道誌」(咸鏡南道誌編纂委員會, 1968)
「北韓文化財實態와 現況」(文化公報部文化財管理局, 1985)
「人物의 고향」-北韓篇(, 중앙일보사, 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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